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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윤이 Mar 26. 2022

엄마의 연애시대

Goodbye To Romance / 써니힐



일곱 살의 우주. 이성적으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감정을 알까 싶은 나이지만.   

나랑 남편이 가끔 장난치며 알콩달콩하고 있으면 귀엽게 흘겨보며 ‘그러니까 엄마 아빠 꼭 사귀는 것 같잖아!’하거나, 신비 아파트를 보다가 최강림이 아픈 구하리를 양호실에 데려가는 장면에서 구하리가 ‘강림아 난 괜찮아’했더니 최강림이 ‘내가 안 괜찮아!‘라고 말했다고 호들갑을 떨며 말하거나, 우주야 너 남자 친구 있니? 하고 물어보면 아니 없어! 하고 괜히 발끈하는 걸 보면 아예 모르는 것 같지는 않다. 아니 어쩌면 ‘연애’에 관한 한, 요즘의 나보다 더 잘 알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결혼 8년 차에 일곱 살의 아이를 키우는 서른넷의 나에게 연애로서의 사랑의 감정이란, 마치 단군 할아버지가 터 잡으시고 홍익인간 뜻으로 나라 세우던 옛날 옛적 이야기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심지어 내가 어떤 연애를 했었는지조차 정말 기억이 잘 안 난다. 상대방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뭘 같이 했는지, 얼마나 좋아했는지도. 하지만 그 가물가물한 기억 속에서도 그 사람과 함께 듣던 노래, 내가 불러줬던 노래, 그가 불러주던 노래, 헤어지고 듣던 노래들은 기억에 선명하다. 역시 연애는 노래고, 노래는 연애다.  

 

내가 한창 연애와 이별을 반복하던 시기는 2007년부터 2013년 정도라 2000년대 노래들이 주를 이룬다. 한창 연애를 할 때는 다이나믹 듀오에 굿러브, 김동률의 아이처럼, 정엽의 Nothing better 같은 것들을 들었고, 이별 후 애도의 기간일 때는 아이비의 이럴거면, 백지영의 잊지 말아요, 윤하의 오늘 헤어졌어요 같은 노래를 노래방에서 열창했다.  

몇 번의 연애에 실패한 후 회의감에 빠져있던 스물다섯 즈음, 이 노래들을 플레이리스트에 한 데 담아 반복 재생을 하며, 나는 그간의 연애에 대한 고찰과 진지한 심경을 담은 글을 썼었다. 다시 읽으려니 너무 오그라들어 웃기지조차 않지만, 지금은 연애에 대한 기억상실에 걸려 있는 상태라 예전에 썼던 글을 어쩔 수 없이 빌려오기로 했다. 제목은 연애의 온도. (아마 영화 연애의 온도를 보고 감명을 받아썼던 글인 듯하다)  

 

 

1. 400℃

스무 살 무렵 첫 연애에서의 나는 불이 붙어버린 마른 장작 같았다. 활활 타오르는 감정을 어쩌지 못했고 지금은 가늠하지도 못할 정도의 설렘과 불안함에 매일매일 시달렸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 애와 연애를 하는 동안 우리 아빠는 ‘강윤이가 걜 훨씬 더 많이 좋아하는 것 같다’고 엄마에게 말했었단다. 그 애와의 연애는 활활 타오르는 불 앞에서 함께 기타를 치고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는 캠프파이어 같았다. 그리고 장작이 다 타버린 캠프파이어가 끝이 날 수밖에 없듯, 그 애를 향해 쏟아지던 내 모든 감정이 다 연소하자 연애는 자연스럽게 끝이 나버렸다. 한번 불이 붙은 마른 장작이라면 돌보지 않아도 늘 활활 타오를 거라 믿었던 그 애는 몇 번이고 다 꺼져버린 불을 살리려고 애썼지만, 이미 새까맣게 타서 재가 풀풀 날리는 장작이 처음처럼 다시 타오르는 일이란 절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작은 불씨들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얼마간 아픈 시간을 보내긴 했지만 금방 타올랐던 만큼이나 금방 꺼져버리고 만 것이다. 그게 바로 나의 스무 살 무렵 연애의 온도였다.     

 

2. 60℃

복구가 불가한 폐허처럼 엉망이던 나의 마음까지도 안아주었던 그와의 연애에서 나는 불에 달군 쇠 같았다. 지난 연애와는 또 다른 뜨거움이었다. 그는 자칫 한눈을 팔았다간 내 사랑이 금방 식어버리리라 생각하는 사람처럼 꾸준히 많은 양의 사랑을 주었다. 사랑에 빠진 여인의 온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옆에서 늘 지켜보고 지켜주었던 것이다. 나는 그를 통해 정말 많이 성숙할 수 있었다. 뜨거운 사랑을 하면서도 나를 잊거나 잃지 않는 법을 배웠고, 또 사랑을 하면 할수록 연소하는 것이 아니라 더 단단해질 수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와 내가 좋은 이별을 할 수 있었던 이유 역시 그 시간들이 만들어 준 서로에 대한 신뢰와 감사함이 바탕이 됐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아무리 최선을 다해 달궈놓은 쇠라도 언젠가는 식는다. 어디서 어떻게 식었는지도 모르게 식어버려 멍하니 한참을 보내기도 하면서. 쇠의 그슬린 자국만이 그 온도를 짐작케 해주는 오랜 연애. 그게 바로 나의 스물다섯 무렵 연애의 온도였다.

 

 

3. -1℃ 혹은 1℃

“왜 슬퍼야 해요? 저 기분 되게 좋은데.”

영화 ‘연애의 온도’에서 방금 이별을 하고 집에 돌아온 영이 인터뷰 카메라에 대고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곧 이어지는 장면에서 영은 침대에 엎드려 엉엉 울고 있다. 으엉,엉,허어어엉,우엉, 하면서. 그리곤 다음 날 아침엔 또다시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흰 밥에 김을 싸 먹으며 시시콜콜한 농담과 영혼 없는 감탄사를 남발한다. 어른들의 이별은 그런 것일까.  

스물한 살에 첫 이별을 했던 나는 동기 언니가 발라주는 생선 살만 보고도 눈물을 뚝뚝 흘렸었는데, 스물다섯 살에 두 번째 이별을 한 나는 그 동기 언니와 소주 몇 병을 나눠 마시면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엉뚱한 역에 내려선 고향 친구에게 전화해 펑펑 울며 했던 말이 ‘그게 아니고, 지하철을 잘못 타서 우는 거야.’이기도 했으니까. 20대 중반, 그리고 오랜 연애 후의 온도는 그렇게 영상과 영하를 왔다 갔다 했다. 크게 슬프지도 않았지만 그래서 충분히 위로하지 못했고, 자주 생각나지 않았지만 그래서 가끔은 하나도 잊지 못했고, 더 이상 믿을 수 없었지만 그래서 믿고 싶었고, 사랑하고 싶지 않았지만 늘 사랑받고 싶었다.  

 

  

4. 36.5℃

그렇게 나(를 비롯한 우리네)의 연애는 적정온도를 찾지 못하고 늘 방황했다. 너무 뜨거워서 데었거나 너무 차가워 시렸거나 너무 미지근해서 심심했다. 대체 연애의 적정온도가 몇 도인지,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지, 애써 찾는다고 해도 변하면 끝이 아닐는지. 글을 쓰면서도 계속, 계속 생각했다. 결론적으로 ‘적정온도’는 못 찾았지만 ‘원하는 온도’는 읽어낼 수 있었다. 지금 내가 원하는 연애의 온도는 36.5℃다. 그냥 현재의 체온으로 사랑할 수 있는 연애. 비정상적으로 뜨거워지거나 차가워지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나의 온도로 함께 걸을 수 있는 연애라면 좋겠다. 물론 날씨에 따라 추울 때도 있고 더울 때도 있고 비가 올 때도 있겠지만, 추울 땐 손 잡으면 되고, 더울 땐 좀 떨어져 걸으면 되고, 비 올 땐 함께 우산을 쓰면 되는 거니까. 그렇게 작은 노력이면 다시금 정상체온으로 돌아가는 건 어렵지 않을 테니까. 아! 그러나 일단  36.5℃의 연애를 하고 싶으면 나 스스로가 늘 36.5℃의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은 진리일 것이다. 결국 행복한 연애를 하려면 나 스스로가 먼저 안정된 에너지 그리고 안정된 온도를 갖는 수밖엔 없단 이야기(로 결론을 맺고 싶진, 정말 않았는데). 끝.  

 

 

그 이후에 나는 글에서 다짐한 것처럼 스스로 적정온도를 지킬 줄 아는 남자를 만나 36.5도에 가까운 연애를 했고, 그 연애는 내 인생의 마지막 연애가 되었다. 그 남자는 여전히 내 옆에서 적정온도를 유지하며 추울 땐 손 잡아주고 더울 땐 좀 떨어져 걷고 비 올 땐 함께 우산을 쓰며 지내고 있다. 그렇게 남편을 사랑하는 감정은 멈추지 않고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처럼 마르지도 않고 그렇다고 넘치지도 않고 평온하고 잔잔하게 흐른다. 어쩌면 그래서 그간의 연애가 잘 기억이 안 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도 가끔 드라마에서 잘생긴 남자 배우가 낯 간지러운 대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치거나, 리얼리티 연애 프로그램에서 남의 썸을 시시콜콜 지켜보거나, 이제 막 연애를 시작한 친구의 상기된 얼굴을 마주할 때면 여전히 두근두근 가슴이 설렐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나는 추억의 플레이리스트를 꺼내는 대신, 이 노래를 선곡해 스피커로 빵빵하게 켜 두고 청승을 떤다. 연애시대가 끝난 자들을 위한 연애 노래. 바로, 써니힐의 굿바이 로맨스.  

(겨울에 들으면 더 좋고, 두 살 차이의 선배를 좋아했으면 더 감정이입이 쉬울 거다.)   

 

 

 

결혼은 했을까   

혹시 내 이름 기억할까  

그 동네에 여전히 살고 있을까  

키는 거기서 크긴 했을까  

이 좋은 기억으로 남길래 그래서  

goodbye   

나의 로맨스여 Goodbye  

바로 어제처럼 느껴지는 그때 그 시간들  

이제는 Goodbye  

나의 로맨스여 Goodbye  

기다림조차도 아름답던 처음 그 떨림도  

이젠 Goodbye Goodbye  

 

 

 

이 노래를 들으면 지난날의 누군가가 생각나는 게 아니고, 그 누군가를 사랑하던 나의 앳된 얼굴이 스쳐 간다. 아무 조건 없이 어쩌면 이유도 없이 누군가를 좋아하던 대책 없는 나. 말도 안 되게 철이 없었지만 꽤나 진지했던 귀여운 나. 지긋지긋하다면서도 끈질기게 연애를 놓지 않던 근성이 있는 나. 결국엔 나를 가장 나답게 해주는 사람을 만나 로맨스에게 작별을 고한 나.  

그 모든 나에게, 내가 있던 시간에게, ‘굿-바이’라고 인사할 수 있는 이 노래가 좋다.

   

‘굿바이 로맨스’를 노래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헬로 로맨스’를 노래하는 사람도 있다는 뜻이겠지.   

시간이 흐르면 우주도 사랑을 할 것이다.  

400℃의 사랑, 60℃의 사랑, 1℃와 영하 1℃, 36.5℃의 사랑을 모두.  

어쩐지 딸의 연애시대가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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