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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준택 Spirit Care Nov 06. 2022

악을 고통스럽게 감내하는 것이 선하게 사는 것?

미드 <하우스 오프 카드>

칸트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악을 온몸으로 감내하고 고민하며 고통스러워하는 것이야말로 선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악은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 속에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선을 행하려는 의지도 혹시 자신의 행복을 위한 이기심의 발로는 아닐까 하는 질문을 해볼 수 있겠다. 결국은 행복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 자체에도 악이 내포되어 있다는 걸까? 성악설처럼?


아무튼, 어떤 악이든지 그것으로 인해 내가 고통스럽다면,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그 고통을 감내하며 충분히 고통스럽게 사는 것이 선이라는 얘기다. 내 안에도 악이 존재하기 때문에.


한편, 니체는 자신을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자신을 더욱 강하게 만들 뿐이라고 했다.

근데 만약, 결국 죽게 된다면? 겪고 있는 이 고통이 나를 죽이게 될지 말지를 어떻게 안단 말인가?


넷플릭스 미드 <하우스 오브 카드> 첫 회, 첫 장면에 고통에 대해 무릎을 치게 하는 통찰이 보이는 대사가 있어 옮겨 본다.


세상엔 두 종류의 고통이 있죠. 더욱 강해지게 도와주는 고통과 아프기만 한 쓸데없는 고통이죠. 그런 쓸데없는 것들은 딱 질색이에요. 이런 때일수록 누군가 나서야죠. 썩 달갑지 않은 일에 총대를 멜 사람... 


이 장면은 이웃집 개가 뺑소니 차량에 치이고 난 직후 고통에 낑낑거리는 개를 보면서 주인공이 독백처럼 한 대사이다. 주인공은 이웃집 주인이 나오기 전에 고통스러워하는 개의 숨을 끊어버린다. 


고통이 그 자체로 선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한 철학적 사유는 논외로 하자. 자신의 이익을 위해 고의적으로 누군가를 고통스럽게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이 경우, 그 고통을 성장을 위한 고통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 고통이 결국 성장에 도움이 되었는지를 나중에라도 굳이 따져봐야 하는 것일까? 타인의 성장을 위한다는 선한 의도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고통을 선하다고 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래서 칸트는 '악은 선한 의지를 행하고자 하는 의지 속에 녹아있다'라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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