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 지음, 2024년 12월 읽음
Aujourd'hui, maman est morte. Ou peut-être hier, je ne sais pas.
『L'Étranger』, Albert Camus
『이방인』L'Étranger
알베르 카뮈 지음 | 이휘영 옮김
문예출판사 | 1999
1. 『이방인』에 대하여
『이방인』은 읽지 않은 사람도 첫 문장은 줄줄 외울 정도로 유명한 그 책이며, 무엇보다 일단 재미가 있고 문장이 인상적인 책이다.
독서모임에서 다음에 할 책이 『이방인』으로 정해졌을 때 처음엔 걱정이 앞섰다. 일단 모임을 통해 (강제로라도) 내가 스스로 고르지 않을 만한 책을 읽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에 이미 여러번 읽은 책을 다시 읽을 것이 조금 아쉬웠고, 무엇보다 내가 『이방인』에 빠져 있었을 때는 … 철학도를 꿈꾸며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명언을 외우던 … 그런 때였기 때문이다. 10대의 냉소적인 렌즈를 끼고 뫼르소에 자아의탁을 시도하던 어릴 때를 생각하면 아찔해졌다.
하지만 하게 되었으니 과연 시간이 흘러 다시 읽는 감상은 어떨지 궁금해지기도 했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도 궁금해졌다. 그래서 여전히 너무나 잘 읽히는 이방인을 순식간에 읽고 실존주의 철학을 다룬 책 몇 장도 뒤적이고 인터넷 서치도 곁들였다.
2. 뫼르소에 대하여
역시나 뫼르소에 대한 감상은 정말 다채롭게 갈렸는데 내가 책을 읽으면서 한 뫼르소에 대한 해석은 다음과 같다.
나는 그에게 다정스럽게, 애정을 기울여, 내가 정말 무엇을 뉘우치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고 설명을 해주고 싶었다. 나는 항상 앞으로 나에게 일어날 일, 오늘의 일, 또는 내일의 일에 마음이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이방인』 p. 121
지난 일에 대한 미련과 잔여물을 남기지 않는다. 그렇다면 뫼르소의 지난 날들은 어떤 역할을 할까? 자아의 한 부분을 구성하고 "나에게 일어날 일, 오늘의 일, 또는 내일의 일"에 대처할 행동 양식을 만들기만 했을까?
새로운 일을 제안하는 상사에 큰 열의를 보이지 않는 점도 묘했는데, "내일의 일"보단 역시 당장 순간의 욕구에만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뫼르소는 아무래도 좋다고 자주 얘기하는데 이는 철저히 어떤 고찰도 배제한 채 자신에게만 초점을 두고 하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결과조차 고려하지 않는 행동은 스스로에게도 무책임할 뿐이다. 현실에 충실한 것과 수동적인, 능동적이지 않은 것은 분명 다르다.
3. 이유?
나는 기다렸다. 뜨거운 햇빛에 뺨이 불타듯 달아올랐고 땀방울이 눈썹에 맺히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은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른 그날과 똑같은 태양이었다. 그날처럼 특히 머리가 아프고 이마의 모든 핏대가 피부 밑에서 지끈거리고 있었다. 그 햇볕의 뜨거움을 견디지 못해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나는 그것이 어리석은 짓이며, 한 걸음 몸을 옮겨본댔자 태양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한 걸음, 다만 한 걸음 앞으로 나섰던 것이다.
『이방인』 p. 75
하지만 이 부분에서 이유에만 집중해서는 안 된다. 욕구는 얼마든지 발현될 수 있다. 하지만 뫼르소에게 결여된 부분은 자신의 욕구에 대한 판단이었다. 방아쇠를 당기기 전에 스스로에게 제동을 걸었어야 했다. 하지만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하지 않은 것인지 할 수 없었던 것인지는 모르지만 뫼르소는 그러지 못했다. 자신의 행동의 결과에 관심을 갖지 못했고, 그것이 옳고 그른지의 생각은 당연히 하지 않았다. 뜨거운 햇빛은 모두의 뺨을 태울 듯 늘 타오르겠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총을 쏘는 건 아니다.
4. 마리와 정상과 비정상
재판의 형태가 시대상에 따라 다르다는 점도 생각하지 않았던 부분이었는데 주목할 만한 의견이었다.
6. 죽음
죽었다면 마리에게 나는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내가 죽은 뒤에는 사람들이 나를 잊어버릴 거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죽고 나면 사람들은 나와 아무 상관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런 일은 생각하기 괴로운 것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사람이란 결국 무슨 생각에든지 나중에는 익숙해지고 마는 것이다.
『이방인』 p. 137
모임에서 이야기 한 것들 중 기억에 남는 것은 이방인은 순차적으로 다양한 죽음을 그려내고 있다는 것이다. 소설의 도입부를 여는 엄마의 죽음, 뫼르소가 저지른 살해, 그리고 본인의 사형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 죽음들은 점점 뫼르소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듯 보인다.
엄마의 죽음은 한 걸음 떨어져 멀리서 바라보았고, 자신이 직접 타인의 죽음을 가져옴으로 인해 그 행위가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결국 자신의 죽음이 눈앞으로 다가오는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재판의 결과가 극단적으로 사형까지 이르게 된 이유가 뫼르소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형태를 그리기 위한 소설적 장치라는 의견도 흥미로웠다.
7. 삶
이미 나의 것이 아닌 삶, 그러나 거기서 내가 지극히 빈약하나마 집요한 기쁨을 얻었던 삶
『이방인』 p. 126
실존주의 사상을 빌려, 목적이 없어도 되는, 어느날 내던져진 삶을 마주한 인간은 그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삶은 나의 것인가? 그리고, 나의 것이든 그렇지 않든 당장 주어진 이 삶을 나는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독서 모임의 이번 기수에서는 유난히 정상과 비정상에 대한 논의가 많이 나왔다. 일상을 살면서도, 여러 매체를 접하면서도 늘 갖고 있던 질문이었기에 이야기할때마다 즐거웠다.
이방인이 존재하려면 기준이 되는 집단이 존재해야 한다. 재판에서 뫼르소를 이방인으로 규정하는 모습을 보며 집단에 속하거나 그렇지 않음을 정하는 기준은 어디에 있는지 궁금해한다면 곧 자신이 살고 있는 집단에도 의문을 가질 가능성이 높다. 내가 속한 이 사회는 나름의 기준에 맞추어 또 다른 이방인들에게 사형 선고를 내릴 수 있을까?
이번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이방인』을 읽고 대화를 나누며 이전과는 사뭇 다른 인상을 남기게 된 것 같다. 전에는 자신에게만 초점을 둔 뫼르소에 이입하여 특정한 사상에 갇혀 배척하는 사람들에게 반감을 가졌다면 이번에는 뫼르소의 행동이나 말에 대해서도 거리를 두고 지켜볼 수 있었다.
한 방향에 갇히지 않고, 일방적으로 누군가를 배척하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기준에만 섞이지도 않으며 살기 위해서는 매순간 삶을 인식하며 깨어있어야 할 것이다.
너는 죽은 사람처럼 살고 있으니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확실한 자각조차 없지 않느냐? 나는 보기에는 맨주먹 같을지 모르나, 나에게는 확신이 있어.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 그것은 너보다 더 강하다. 나의 인생과 닥쳐올 이 죽음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내게는 있어. 그렇다. 내게는 이것밖에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이 진리를 그것이 나를 붙들고 놓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굳게 붙들고 있다. 내 생각은 옳았고 지금도 옳고 언제나 또 옳으리라. 나는 이렇게 살았으나, 또 다르게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런 것을 하고 저런 것을 하지 않았다. 어떤 일은 하지 않았지만 이러저러한 다른 일은 했다. 그래 어떻단 말인가? 나는 마치 저 순간, 나의 정당함이 인정될 저 새벽을 여태껏 기다리며 살아온 것만 같다. 아무것도 중요한 것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