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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Haru Aug 27. 2021

라떼는 말이야

라떼는 죄가 없다

화자는 이야기 꾸러미를 풀 준비를 하고, 청자는 귀를 닫을 준비를 한다.

‘나 때는 말이야’를 그럴 듯한 말로 표현한다. 비꼬는 의미를 포함하는 것 같아, 들을 때마다 불편한 생각이 든다. 기성세대는 알아듣지 못할 단어로 암호처럼 사용하고자 했던 숨은 의도까지 의심한다면 음모론자가 되는 걸까. 부정적인 느낌으로 다가오는 건 어쩔 수 없다.


자신의 지나간 이야기, 젋었을 적, ‘잘 나갈 때’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면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라고 한다. 가난하고 힘든 시기를 (무식하고 가진 것 없이도) 이만큼 살아낸 부모세대는 이에 합당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교육을 포함한 좋은 환경에서 많은 걸 누리고 산 세대는 기존 세대보다 더 잘 사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했다. 그래서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젋은 세대(그들의 자녀를 포함)를 보면 안타까움과 약간의 실망스러움과 한심함을 드러낸다. 굳이 감추지 않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 당연한 수순으로 따라오는 것이 ‘나 때는 말이야’다. 이 말을 시작으로 어려운 시절에 본인이 이루어낸, 감내해낸 미담을 풀기 시작한다. 감출 의도가 없을 수도, 듣는 이의 자격지심이 반영되기도 한 그 말은 ‘실망과 한심함’을 느낄 수 있기에 더 듣기 싫어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처음은 대단하다며 순수하게 듣던 말들이 현실을 전혀 반영하지 못한 말로 귀와 마음에 닿지 못하고 튕겨 나간다.


각각이 세대가 겪는 고난은 다르다. 나는 82년 공지영을 보고 세대와 처한 상황에 따라 고민의 지점이 다르다는 것을 실감했다. 경제적 안정감이 절실한 사람은 그런 문제는 존재하지도 않는 김지영의 상황을 보고 공감하지 못한다. 시댁에서의 며느리의 위치는 그 정도는 문제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남편의 공감과 지지가 결핍된 사람은 그런 남편만 있으면 다 해쳐 나갈 수 있다고 말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펑펑 운 친구는 살면서 본인이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결혼하고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 그 순간들을 참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너무 힘들었고, 영화에 공감이 많이 되었단다. 82년 김지영이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마지막 친구의 마음이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나 때는 말이야’가 ‘라떼는 말이야’가 된 이유가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상황과 고민이 다른데, 그 당시의 고난과 역경을 헤쳐 나온 방법이, 공감하지 못하는 모습이 싫다는 뜻으로-거부하는 이미로 사용된 말일 것이다.


그런 말과 태도를 무조건 거부해서는 안 된다. 자부심과 시간을 무시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그 시간을 성실함과 부지런함으로 채워온 것은 충분히 존경받을 만하다.

우리가 보내는 이 시간 역시, 다른 ‘힘듦’으로 존중받아야 한다. 이미 형성된 부를 넘어서기는 불가능한 현실을 살고 있다. 개천에서 용이 날수도, 없는 집에서 애들이 공부는 더 잘하기도, 인생역전이 이루어지기도 힘들어 꿈조차 꾸지 않는 세대들이 늘고 있다.


사실 내가 어느 세대에 속하는지 모르겠다.

다만, 그들을 향한 응원과 지지와 부모세대의 의지와 열정을 기억하며 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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