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에는 걱정 끼치지 않게, 시댁에는 착하고 순종적인 며느리로 살았다. 남편의 평온함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는 아내였다. 결핍이 많은 아이라 생각했기에 늘 yes라 말하는 엄마였다. 몸과 마음은 한없이 고단했지만, “평화로운 상태”가 좋아 그렇게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이 모든 것이 내 마음이 편해지는 길이라 의심치 않았다. 경제적, 문화적 가치관이 다르다는 것은 생활의 많은 부분에서 갈등을 일으킨다. 동의할 수 없는 영역에선 나는 포기를 택했다. 원래 목소리가 큰 사람이 이기는 것이 국 룰인 법이니.
나는 열심히 살지 않았다. 나를 외면했다. 상황을 타인을 원망했고, 내 마음을 견뎠다. 이불속의 포근함과 늘어짐에 빠져 “만약”을 상상하느라 잠을 찾는 시간이 늘어났다. 눈을 뜨면 지금이 아니길 소원했다. 시간이 날 때면 도서관, 카페,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혼자인 시간을 즐겼다. 마음의 우울함까지 해결할 수는 없었지만, 그 순간이 좋았다. 좋은 사람이 될 필요도, 그럴듯한 말과 태도를 갖추지 않아도 상관없는 시간, 상대의 속내를 살피지 않아도 되는 시공간이 좋았다. 둘로 나뉜 시간을 살았다. 책임과 역할에 충실한 나와 그렇지 못한 내가 존재했다. 불행히도 나는 균형을 잃었다.
상대는 인정하지 않지만, 그 역시 균형감을 잃은 것으로 보였다.
그는 많은 역할을 훌륭히 잘 해내는 사람이었다. 부모에게 효심 깊은 아들이고, 형제에게 늘 미안하고 대견한 동생이었다. ‘성질이 좀 있긴 하지만, 그게 다 제 할 일을 다 해서 떳떳한’이라는 집 안(시댁)의 평을 받았다. 내 이해 범주를 벗어난 일까지 묵묵히 본인의 역할이라 생각하고 살았다. 나와 아이가 포함된 가정이 유일하게 그냥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고 편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이라 했다. “그냥 가만히 두는 것”을 원했다. 그도 나처럼 “역할의 비중에 따른” 에너지의 균형을 잃었고, 그 쉼의 작업을 문이 닫힌 자신의 공간에서 해결했다.
그도 그 좁은 방에서 외로웠을지도 모르겠다. 상대가 먼저 다가와 주기를 바랐을까. 나는 20년을 살았지만 이마저도 확신할 수가 없다. 그는 늘 나에게 이해와 예상의 범주를 벗어나 있어 어려웠고, 나오지 않는 상대를 부르기엔 내가 너무 소심하고 겁이 많았다. 나는 닫힌 문 앞에서 늘 주저했다.
나는 우리의 무너진 균형감을 함께 해결하길 원했지만 용기가 없고, 그는 각자 원하는 방법으로 해결하길 바라면서 나의 동의를 구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다. 흘러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