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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Haru Aug 23. 2021

우리 "룸메" 하자

일상의 평화를 위해서

오만가지 불안과 생각이 의식을 깨우지만, 나의 이른 아침은 대체로 평화롭다.

간단한 세수를 하고 편한 옷차림으로 집을 나선다. 좁은 방 안에서 학교 갈 준비를 편하게 하라는 나름의 배려다. 대부분은 텅 빈 공원이 좋아서 걷기를 한다. 충분히 시원하다 여겨지는 날은 노트북이나 책을 한 권 챙겨 나서기도 하지만 결국은 산책으로 마무리가 된다. 사람들의 걸음 속도로 시간을 짐작한다. 여유 있는 출근과 지각의 다급함은 모를 수가 없으니 말이다. 


함께 사는 이(동거인, 친구, 배우자 정확한 명칭은 알 수 없다)를 “룸메”라고 칭하는 작가의 글을 읽었다. 얼마나 멋진 표현이던지. 물론 작가의 담백하고 멋진 필력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늘 관계에 목마르고 질척거리는 나를, 때문에 늘 혼자 힘들고 복잡한 생각의 늪에 빠져 사는 내게 필요해 보인다.   




전날 아이와 다툼이 있었다. “엄마가 제일 필요한 것이 저 사람은 저럴 수 있구나”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날을 세웠다. 나는 그저 “네가 같이 산책도 하고 군것질거리도 사러 나가면 엄마도 덜 심심하고 좋은데, 아쉽다”라고 한 건데, 아이는 외출을 싫어하는 자신에게는 그 말마저 부담이 된단다. 자기는 엄마의 성향이나 알아서 할 영역이라 생각해서 상관하지 않는데, 나는 그러지 않는다는 것이다. 남편과 똑같은 말을 한다.

내가 상대를 인정해 주는 힘이 부족한 걸까. 둘의 세상에서 나는 살기가 너무 힘이 든다. 서로를 인정하는 것과 ‘함께’에 대한 이해를 나는 혼돈하고 있는 것일까.     


‘본성의 존중’ 남편의 표현이다. 남편은 ‘배가 고플 때, 먹고 싶을 때 먹는’ 사람이라고 했다. 생활의 모든 전반에 이 철학은 적용된다. 본인이 차려 먹으니 너에게 피해 주는 일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싱크대가 깨끗한 순간이 없었다. 아이와 나 둘이서 밥을 먹는 날이 많았다. 새벽에도 부엌에선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어느 순간 아이도 원하는 순간에 밥을 먹었다. 우리는 함께 살았지만 취향과 본성의 존중이라는 이름으로 따로 살았다. 누군가는 남편을 욕하기도, 편하게 생각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를 탓하기도 했다. ‘함께’라는 말이 누군가에겐 부담이고 폭력이라고 한다. 나 역시 동의한다. 내가 ‘가족’이라는 명목으로 가해자 역할을 하고 있었나. 내가 상대를 그렇게 존중하지 못하는 사람임을 남편과 아이를 만나고 알았다. 

나는 끼니때를 맞춰 식사를 하는 가정에서 자랐다. “먹을 때 다 같이 먹자” 등하교, 출근 시간이 달라 아침, 점심은 어쩔 수 없더라도 가족들이 함께 있을 때는 이 명제가 유효했다. 엄마가 두 번 일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아빠의 선한 의도도 포함된 말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개인보다 함께의 개념을 무조건 상위에 두고 가족이라 묶어 놓고 생각을 했나. 

다름의 인정이 중요하니, 어떻게든 노력은 해야 할 듯하다. 


나는 홀로서기를 준비 중이다. 아직은 미성년인 룸메가 있어서 완전한 독립은 아니지만, 그 순간이 올 때까지 이상적인 “룸메”의 자격으로 맘 상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다.     


매미의 울음소리가 여전히 여름임을 알려준다. 한낮의 더위만 피하면, 가을이라 여길 수도 있을 정도의 바람이다. 유난히 힘들었던 여름이었다. 빨리 지나가버려 기억조차 나지 않는 어느 해의 여름이 되길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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