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꼭 가보세요. 저도 이틀 정도 생각하고 갔다가 하루씩 연장해 5일 동안 있었다니까요 ]
라는 후배의 말이 생각나 터키의 중부지역에 있는 카파도키아에 왔다
동쪽 끝에 가기 전 들르기에 적당한 장소인 것 같았다
그때까지도 막연히 동쪽으로 가보자는 생각은 있었지만
공항에서 만난 여행사 매니저의 얘기도 있고 해서..
정말 거기에 가게 될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었다
일단 어디든 도착한 후에 생각해보기로 할 뿐이었다
물론 이렇게 계획이 없어도 괜찮은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긴 했다
돌이켜보면 나는 이것을 무슨 신성한 일처럼 생각했음이 틀림없다
그래서 아무 계획을 만들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모든 일에 이성적이고 계산적으로 살았던 그동안의 삶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이제는 그냥 어디든 내키는 곳에 가보자고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보자고 생각했던 것이다
카파도키아는 매우 척박한 곳이지만
또한 매우 다양하고 멋진 풍광이 끝없이 펼쳐진 지역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지역은 대략 우리나라 정도의 크기였고 내가 지냈던 곳은 그 일부분에 불과했었다
그리고 잘은 모르지만 복잡하고 오랜 역사가 있는 곳인 듯했다
여행객들과 얘기를 나누다 알게 된 사실은
이슬람 국가에는 라마단이라는 게 있다는 것이었다
40일 동안 낮시간에는 음식을 먹지 않고 해가 지면 식사를 하는 것인데
왜 그러는 것인지는 몰랐지만, 이들에게는 꽤 중요한 의식인듯했다
내가 갔던 때는 라마단의 절반 정도가 지난 때였다
묵었던 숙소 근처에는 검둥이 개가 있었다
여기저기 나타나는 걸 보니 동네를 떠도는 개인듯했다
내가 뭔가를 먹을 때마다 근처를 어슬렁거리다 앉아있곤 했다
여행객들은 들뜬 기분에 취해 인심이 후해진다는 사실을 잘 아는 듯했다
나도 먹고 있던 샌드위치를 조금씩 떼어 주곤 했다
이후로 녀석은 떠나는 날까지 나의 친구가 되어주었다
항상 따라다니는 녀석을 말동무 삼아 지루하지 않게 지낼 수 있었다
같은 방을 쓰던 일본인 관광객들이 개를 어떻게 길들였느냐고 물어보기에
[ 샌드위치.. ]
라고 대답할 뻔했으나 나의 녀석의 품위를 생각해
[ 착한 녀석이에요. 광장 어귀에서 만난 후로 친구가 되었답니다 ]
라고 답해주었다
어쨌든 후배의 말이 맞았다
하루나 이틀 정도 묵을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덧 4일이 지났다
이곳의 풍광을 모두 즐기기에는 턱없이 짧았지만 나에게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지체되었던 또 다른 이유는 이제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정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분명 서쪽 해안가가 좋을 것 같았다
그리스식 섬도 있고 파묵칼레라고 하는 멋진 관광지가 있다고 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서쪽으로 가는 것에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왜인지 나의 마음은 동쪽으로 가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런 고민이 며칠 동안 계속되자 나중에는
내가 진짜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동쪽에 가려고 생각할 때마다 여행사 매니저의
'2주 전, 오스트리아인 4명 납치'라는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숙소 주인에게 물어봐도 동쪽 국경은 가지 않는 게 좋다고 했다
또 한국인 여행객들에게 지금 있는 곳에서 동쪽은 위험지역이니
더 이상 들어가지 말라는 문자 메시지가 하루에 한 번꼴로 오고 있었다
어느 모로 보나 나는 분명히 서쪽으로 가야 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생각해보았지만 확실한 이유는 없었다
떠나기로 한 전날 저녁까지 결정을 내리지 못 한 나는 결국 그 상태로 잠자리에 누울 수밖에 없었다
막연히, 내일 새벽 떠오르는 해를 보았을 때 처음 드는 생각을 따라가기로 해 볼 뿐이었다
그것 외에 별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뜬 눈으로 밤을 새우다시피 하고 날이 밝아오기 시작할 무렵 숙소 뒤의 산으로 올라갔다
아직 해는 떠오르지 않았다
능선을 따라 한동안 걷다가 가파른 절벽이 나타나자
그 자리에 주저앉아 생각에 잠겼다
내 마음에는 언제나 공허함이 있었다
분명 뭔가 있어야 할 자리에 공백이 생긴 것처럼
누군가 허락도 없이 저질러 놓은 고약한 장난 같은 그 공백은
그것과 꼭 맞는 것이 아니라면 어떤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을 것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와 같은 그 공허함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큰 충격이었고 한동안 나에게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그것에 대해 알아갈수록 놀랐던 것은
훨씬 오래 전의 사람들 역시 이런 고민을 하며 살았다는 것이다
어떻게 인간이 역사 내내 한 가지 고민을 계속하며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채 살아갈 수 있는가?
내게는 이것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나는 스스로를 도구로 사용해 그 공백을 메우려 했다
나에게 중요했던 것은 내 존재를 인정받는 것
다른 이들에게 중요한 존재가 되어 영향력을 미치게 되는 것이었다
모든 인간의 재능은 그것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고
내 시간들은 그것을 위해 쓰여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분명히 어떤 성취나 세상의 인정으로도 그 공허는 채워지지 않았다
성취감에서 오는 기쁨은 매우 짧았고 곧 그보다 더 큰 공허가 다시 찾아왔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나는 이것이 결코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죽는 순간까지 이것을 반복해야 하는 것이 인간의 삶인가
그것은 내가 찾던 답이 아니었고 거기에 만족할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찾을 것인가?
지금껏 내가 의지했던 이성과 합리성은 나를 실망시켰었다
그것들은 보다 본질적인 어떤 것을 해결하지 못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내 마음에 또 하나의 소리가 있음을 발견했다
너무 작고 세미해 주의 깊게 듣지 않으면 결코 들리지 않을 그런 소리였다
그러나 그 소리는 사라지지 않았고 내가 절망 속에 있을 때마다
곁에 다가와 결국 자신의 이야기를 듣도록 만들었다
만신창이가 된 나에게는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소리에 이끌려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떠오르는 해를 보았을 때 내가 더 이상 고민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잠시 후 산에서 내려와 검둥이에게 인사를 하고 동쪽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가끔 길을 잃은 것 같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과연 내가 맞게 가고 있는 건지 알 수 없고
앞에 놓인 선택 중 어떤 것에도 확신이 들지 않을 때
그럴 땐 혼자 새벽을 맞이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밝아오는 여명 속에서 마음에 들리는 첫 음성을 듣는 것.
우리는 그렇게 차츰 마음속의 세미한 소리를 듣는 법을 배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