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 되어 우리는 각자 길을 나섰다
추수가 끝난 초겨울의 시골길은 아름다웠다
새소리와 안개로 채워진 평온한 공간이었다
곧이어 나타난 야트막한 산 정상에 오르자
비아노스가 두꺼운 패딩을 벗고 테이블 위에 누워 있는 모습이 보였다
산 정상은 돌로 만들어진 테이블과 의자가 여기저기 있어 쉬어가기 좋은 장소였다
배낭을 벗고 쉬고 있으려니 저 아래서 마리아가 올라오는 게 보였다
우리 세 사람은 만난김에 좀 이른 점심을 먹기로 했다
나는 1/3쯤 잘라놓았던 바게트를 꺼내 그 위에 튜브 크림치즈를 치약 짜듯 발랐다
설탕과 치즈를 반씩 섞어놓은 듯한 그 치즈는 싸구려였지만
눅눅해진 빵을 그나마 먹을만하게 만들어준다
길 위에서 먹었던 음식은
여행 내내 먹었던 값싼 음식에 비해서도 형편없었다
그저 계속 걷기 위해 채워넣는 연료같은 느낌
(먹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 다행이야)
라고 생각하며 빵을 입안에 넣으려는데
자극적인 화학약품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런 바보 같으니라고.
빵에 잔뜩 발라져 있던 건 크림치즈가 아니라 어제 마리아가 준 통증완화제였다
[ 제길, 나 방금 빵에 근육크림을 발라 먹을 뻔했어 ]
양손에 근육크림과 치즈튜브를 들고 번갈아 보며 말하자
마리아와 비아노스가 땅이 꺼져라 웃는다
[ 그거 뭐야 발이 아플 때 보통 발라 먹는 거야?ㅋㅋㅋ ]
[ @%$&)(*)*^&%*&%!!? (포르투갈어) ]
[ 빵에 근육통이라도 걸린거야 뭐얔ㅋㅋㅋㅋ ]
[ @#$&$%#^$%&!%%^ ㅋㅋㅋㅋㅋ (놀리는 느낌의 포르투갈어) ]
[ 나도 좀 줘봐 목에 근육통 걸린 거 같어 ㅋㅋㅋㅋ ]
[ 야! 넌 놀리면 안 되지! 니가 준 거자나! ]
..여기서는 뭐든 이야기거리가 된다
우리는 내 시덥잖은 실수로 한참을 웃고는
조금 더 담소를 나누다 다시 각자 길을 출발했다
한참을 걸어 산 밑 도로의 포장된 길이 끝나고 광활한 평야가 나타나자
발목의 통증이 다시 몰려오기 시작했다
설상가상 비까지 내리기 시작해 발걸음이 더 무거워졌다
배낭을 뒤져 바르셀로나의 중국인 잡화점에서 사두었던 두개의 우의중
하필 손에잡힌 핑크색 우의는 쓸일이 없기를 바라며
옆에 있던 파란색 우의를 집어들었다
비를 맞으며 걸어가고 있자니 아무리 봐도 신세가 한심했다
사흘 동안 변변찮은 식사에 제대로 씻지도 못한데다
추위에 떨며 잔 덕에 근육은 뻣뻣해져 있었고
발목의 통증은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이 길이 과연 끝나기는 할까?)
통증을 잊기 위해 다른 생각에 집중하려 애썼다
(물론 언젠가 끝나겠지, 그 다음엔?)
그 다음엔.
그 다음엔 뭘까?
다시 텅 빈 집으로 돌아가 반복되는 하루를 살아갈 거야
그렇게 살면서 보잘것없는 성취감에 으스대고
어쩌다 실패라도 하면 끝도 없이 좌절하겠지
그리고 그 다음엔?
그 다음엔 뭘 해야 하는걸까?
이런 생각들이 꼬리를 물어 침울해질 즈음
출발하던 날 들었던 소리가 다시 생각났다
( 이 길이 끝났을 때 너는 기쁨을 발견할 것이다 )
좋아! 잠깐만. 이 문제를 짚고 넘어가자
난 유물론자다
그리고 그닥 감상적인 체질도 아니다
그러므로 물리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쯤은 구분할 줄 아는
유딩교육을 무사히 마친 정상인으로서 말하건대..
그 목소리가 귀로 들렸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귀로 듣는 것보다 더 생생하게 느껴졌었다
특히 (기쁨을 발견할 것이다)라는 소리는
마음속에 자꾸 밀려와 되뇌어졌다
그 목소리는 분명 '기쁨'이라고 했다
어째서 사랑도 정의도 평화도 아닌,
지구정복의 비법이나 로또 번호도 아니고
그렇다고 구운 베이컨이나 마드리드행 티켓도 아닌
하필 '기쁨' 이었을까?
이유는 모른다
그리 들린 걸 어쩌겠는가
한 가지 분명한 건
길을 걸으며 고통이 오는 순간마다
인정하기 싫었던 그 소리에 나는
사실 많은 위안을 얻고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자신이 고통을 두려워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 두려워하는 것은 공허함이다
모든 것이 끝난 뒤에 공허함만 남을지 모른다는 가능성
우리는 그 가능성을 두려워한다
걸음을 잠시 멈추었다
여행이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다
그 자리에 서서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인 채
나즈막한 소리로 기도했다
이길이 무의미하게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부디 저를 세상에 혼자 있게 하지 마십시오
저는 그저
지친 몸으로 길을 걷고 있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