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막 저녁으로 들어섰을 즈음 곤한 몸을 이끌고 숙소에 도착했다
안에는 미소가 착해 보이는 청년과 알이 두꺼운 안경을 쓴 숙녀가 앉아 있었다
자신들도 게스트이며 조금 전에 도착했다고 한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순례자들이 속속 도착하고 있었다
스테파니와 숙희 누님도 보였다
그들과 반갑게 인사를 하고 거실을 둘러보다가 입구 옆에 있는 부엌을 발견했다
꽤 넓고 실용적이면서 포근한 느낌의 부엌 안에는
먼저 다녀간 한국의 순례자들이 화이트로 그려놓은 일러스트도 있었다
간만에 부엌을 보니 따뜻한 음식이 그리웠다
생각해보니 일주일 동안 거의 마른 빵과 참치캔만으로 식사를 해결했던 것이다
이제 참치라면 메스꺼워 보기도 싫을 정도였다
다시 거실로 나오니 대여섯명의 사람들이 앉아서 쉬고 있었다
[ 혹시 저녁식사로 파스타 먹고 싶은 사람이 있나요? ]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는 말에 사람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멍하니 바라본다
반은 뜬금없는 말에 당황한 듯했고 반은 못 알아들은 듯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손짓으로 어깨 넘어 부엌을 가리키며
[ 파스타요.. 우리 요리할 수 있는데.. ]
이제는 무슨 얘기인지 다 안 듯 했지만 대답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별 반응이 없자 머쓱해져 돌아서려는데 독일 친구 스테파니가 같이 먹겠다고 한다
스테파니와 대충 얘기한 다음 위층으로 올라가 옷을 갈아입고 막 노을이 지기 시작한 밖으로 나왔다
숙소 옆 공터에는 한 무리의 남녀들이 장작으로 쓰려는 듯 나무 팔레트를 열심히 부수고 있었다
열심히 일 하는 그들을 못 본척 할 수 없어 다가가 도끼를 달라고 했다
그 시간에도 떨어지고 있는 해가 아쉬워 팔레트 한 개를 미친 듯이 부숴 장작으로 만들고
할 만큼 했다 란 표정으로 자리를 뜨려는데
[ 선유야 어디가? ]
같이 장작을 패던 스테파니가 묻는다
[ 잠깐 걷고 싶어서.. ]
[ 이제 곧 상점이 열거 같은데, 사람들 말로는 금방 닫는다나 ]
[ 금방 돌아올게. 노을을 보고싶어서 ]
발목은 아팠지만 아름다운 저녁하늘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마을의 외곽 쪽까지 산책을 한 뒤 돌아오니
스테파니가 알베르게 입구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 여기 있었구나 재료 사러 가자 ]
[ 아, 그냥 내가 사왔어 언제 닫을지 몰라서 ]
비닐봉지를 하나 건네준다
[ 그랬구나 고마워 ]
그녀에게 재료비 반을 주고 숙소로 들어오니
저녁 식사 멤버는 안경숙녀와 숙희 누님까지 4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부엌으로 와 스테파니가 사온 재료를 대충 보니
스파게티 면과 토마토소스 2팩, 그리고.. 참치캔이 있었다
( 아 쫌! )
오늘 저녁마저 참치로 요리를 해야 하다니..
씁쓸한 마음을 달래고 요리 준비를 하려는데 스테파니가 묻는다
[ 마린다(안경숙녀)가 파랑 마늘을 조금 갖고 있대, 넣을래? ]
도대체 파랑 마늘은 왜 갖고 다니는 거냐!
고 묻지는 않았다
드라큘라가 (순례길에서)나올까 봐 갖고 다니는 걸 수도 있고
단순히 마늘 매니아일 수도 있지 않은가
[ 으응.. 주면 좋지.. ]
물이 끓는 동안 불안한 마음으로 소스를 만들었다
맛있어야 할 텐데..
참치 스파게티소스는 처음이라 어떤 맛이 나올지 예상이 되지 않았다
부엌에 있는 조미료로는 맛을 내기에 충분하진 않았지만
어쨌든 우리의 일용할 음식을 망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요리를 내놓았을 때 그들이 앞에 놓인 포크로
면 대신 나를 찌르는 모습은 굳이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잠시 후 안경숙녀가 옆으로 오더니 다른 냄비에 노란 쌀을 넣고 밥을 짓기 시작했다
조금 끓기 시작하자 가운데 마늘을 넣는다
[ 앗, 거기에 마늘은 왜? ]
[ 소스랑 먹으면 맛있을 거 같아서 ]
.. 그냥 마늘 매니아쪽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안경숙녀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남은 마늘을 나에게 들이대며
[ 근데 이건 영어로 뭐라고 해? ]
( 야, 임마! )
[ 가.. 갈릭.. ]
[ 아 그렇구나.. 갈릭갈릭.. ]
뭔가 중얼거리며 외우고 있다
간만의 따뜻한 식사를 함께하고 부른 배를 쓰다듬으며
다같이 난로에 불을 피우고 둘러앉았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아늑함 이었다
[ 포도주라도 있으면 좋겠았다.. ]
무심코 꺼낸 말인데 스테파니와 마린다가 맞장구를 친다
[ 요 앞에 바가 있던데 마시러 가자 옷 입고 나올게 ]
말을 꺼내고 바에 들어가기까지는 5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어둑한 바에는 의외로 사람들이 많았다. 대부분 주민들이었다
무뚝뚝하게 맞아주는 바텐더에게 포도주를 부탁했다
숙희 누님은 그때까지도 이름을 알려주지 않고 있었다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줄은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누님과 이야기를 나누며 고향이 어디인지, 무슨 일을 했었는지,
왜 오게 되었는지 물을 때마다 서툴게 주제를 돌렸다
그녀의 마음은 굳게 닫혀 있어서 피상적인 이야기밖에 나눌 수 없었다
무엇이 그녀의 마음을 닫히게 만들었을까?
만약 뭔가 아픔이 있는 거라면 이 길이 그 상처를 치료해주길 바랬다
한잔을 비워갈 즈음 비아노스가 마실것을 사러 들어왔다
그와 반갑게 인사를 한 뒤 남은 이야기는 숙녀들의 몫으로 남겨두고
비아노스와 함께 알베르게로 돌아와 침대에 앉아 책을 폈다
순례길을 걸으며 같이 읽기 시작한 [아직도 가야 할 길]은
제일 두껍기도 하고 읽기 싫어 남겨두었던 것인데
길을 걸으며 읽기 시작한 것이 어느덧 마지막 부분을 향하고 있었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은 정신과 의사 M 스캇 펙이 쓴 책으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정신적인 문제의 원인을
그들이 겪어야했던 상실과 무의식에서 찾고있었다
스캇 펙은 또한 은총에 대해 쓰고 있었다
세상에는 기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치유의 사례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는 그것을 은총이라고 표현하고 있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 대충 넘겨보고 산 책인지라 이런 내용인 줄은 몰랐는데
읽는 동안 의외로 많은 영감을 얻을 수 있었다
그렇게 마지막 부분을 다 읽어갈 때 즈음
이 책은 그냥 우연히 나에게 온 것이 아니라
숙희 누님에게 가기 위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 잘 준비를 하는 시간
반대편 방에서 자리를 펴고 있던 숙희 누님에게 갔다
[ 제 여행은 거의 끝나가요. 이 책을 드리고 싶어서 왔어요. 다 읽어버려서 이제는 짐이 되네요 ]
처음에 사양하던 누님은 이내 책을 받고는 고맙다고, 잘 읽겠다고 했다
그렇게 인사를 하고 자리로 돌아와 잘 준비를 하는 동안
그녀가 정말 어떤 상처를 가지고 있다면
그리고 스캇 펙이 말하는 은총이 어딘가에 존재한다면
누님에게도 그 은총이 함께하길 기도했다
잠자리는 매우 포근했다
아직 이틀의 여정이 더 남아 있지만
이미 이 길을 마친듯한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