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 준비에 한창인 아침
습관적으로 서로에게 오늘 어디까지 가는지 물어본다
스테파니와 마린다는 레온까지 갈 예정이라고 한다
( 말도 안 돼 )
레온까지는 여기서 40km 거리이다
테라딜로스에서 만난 착한 할아버지가
어디서 들은 정보인지 [ 노 알베르게 ] 라고 한다
중간에 열린 숙소가 없다는 얘기 같았다
며칠간 이어진 나쁜 컨디션 때문에
25km,15km씩 이틀에 나눠 가려고 했는데, 이제는 선택의 여지가 없게 되었다
게다가 우리 할아버지마저 해맑은 표정으로 레온까지 간다니
손자뻘인 내가 엄살을 부려선 안 되지 않겠는가
하는 수 없이 속으로 (해보자)를 외치며
마음을 다잡고 출발했다
그렇게 출발은 했지만
한 시간여가 지나자 역시 발목이 다시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만신창이가 된 스니커즈로 돌밭 길을 걷다 보니
며칠간 끊임없이 접질리고 삐었던 발목이
이제는 한계에 다다랐다며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고통속에서 마침내 25km를 오니
이젠 정말 멈춰서 아무 데나 쓰러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시간은 어림잡아 오후 두 시정도 된것 같았다
어떻게든 숙소를 구해 머물고 싶은 심정과
15km만 가면 끝낼 수 있다는 생각이 수없이 교차했다
이제 흙바닥이라면 지긋지긋했다
지독한 고통 때문에 격앙되어 있던 나는 결국 남은 길을 마저 걸어
오늘 이 지랄 맞은 길을 끝내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이미 다리는 내 의지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고
그나마도 지팡이 덕에 위태로운 걸음을 겨우 걸어내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더 걸어 고속도로에 인접한 작은 마을을 지나
레온까지 5km 정도를 남겨두었을 때 눈앞에 다시 높은 언덕이 하나 나타났다
간신히 언덕 아래 까지 와서는 그 자리에 나도 모르게 주저 앉았다
이미 한계에 다다른 몸은 (불가능)이라고 얘기하고 있었고
온전한 이성을 가지고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더이상 걷는것은 무리였다
길에 버려진 벽돌을 의자 삼아 앉고는
고통으로 마비된 온몸을 인내하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아아-]
목은 제멋대로 탄식 섞인 한숨 소리를 내뱉었고
마비된 사지는 더이상 내 몸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죽고 싶은 기분으로 한참을 앉아 있었다
해가 더 떨어지기 전에 출발해야 했지만
한 번 잃어버린 정신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머리는 어서 출발하라고 재촉하고 있었지만
더이상 의지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몸 때문에 다시 주저앉기를 몇 차례
마지막 남은 힘을 짜내 간신히 일어섰다
두 발목은 이미 부을 대로 부어올라
지팡이에 의지하지 않고는 한 발도 걸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다리에 무게를 실을 수 없어 체중의 반을 지팡이에 의지해 걷다 보니
손바닥은 물집이 벗겨져 벌건 살을 드러내놓고 있었고
이미 며칠 전 부터 삐끗했던 발목의 통증은
걸을 때마다 예리한 송곳이 되어 아킬레스건을 찔러댔다
[ 아아악! ]
입에서 원하지 않게 비명이 나왔다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신경을 찢는 고통의 헤머가
발목에서부터 척추를 타고 올라와 머리를 내리쳤다
이제 마르고 쉬어버린 목에서는 매 걸음마다
쇳소리 섞인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 아아악! ]
소리 지르지 않고는 걸음을 걸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이 여행을 떠난 이유나 의미 같은건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악에 받힌채 오기와 증오만으로 이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내몸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평생 입에 담아본적 없던 욕들이 목 끝까지 올라왔다
발목이 부러지거나 차라리 다리가 없어졌으면 좋았을지도 몰랐다
그러면 나를 이런곳으로 내몰았던 그 존재를 마음껏 저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증오와 분노밖에 남아있지 않은 모습으로
결국 언덕의 정상에 올라섰다
언덕에 올라선 순간 나는 말을 잃고 말았다
내 앞에는 앞서간 순례자들이 매어놓은 십자가와 하트가 철조망위에 빼곡히 수놓아져 산 밑까지 이어져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이제까지 나를 소유한 채 악취나는 삶을 살도록 했던 나의 본성과 함께
길 위를 가득 매운 사랑의 상징들 앞에서 너무도 추한 모습으로 서있는 나를 보며 깊은 수치심을 느꼈다
그곳에 나는 없었다
등감과 자괴감으로 얼룩진 육체가 있을 뿐이었다
왜 울고 있는가?
제 자신을 확신할 수 없습니다
왜 확신할 수 없는가?
저는 너무 나약합니다
왜 너는 나약한가?
너무 오랫동안 추한 모습으로 살았습니다
왜 너를 추하다고 생각하는가?
거짓된 모습 뒤로 숨으려고 했으니까요
너는 무엇 때문에 숨으려 했는가?
저에겐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습니다
왜 너에게 믿음이 없다고 생각하는가?
저에게는 자신을 사랑할 자격도,
누군가를 사랑할 자격도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사랑받을만한 이가 되면 되지 않는가?
저는.. 사랑받을만한 인간이 되고싶지 않습니다
그래, 너는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눈물 때문에 흐릿해진 시야 너머로
철조망에 매달려 있는 십자가들이 보였다
오랜 시간 동안, 길을 잃고 외로워하던 우리들에게
신이 여전히 인간을 사랑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증거였다
하지만 내가 한 일이 있다
너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게 될 것이다
천천히 다시 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길을 따라 내려오는 동안
긴 철조망을 가득 채운 십자가와 하트 하나하나를 보며
이 길을 지나갔을 순례자들을 생각했다
무엇이 그들에게 길을 걷도록 만들었으며
이 언덕 위에 십자가를 수놓게 하였던 것일까?
그것은 메시지였다
세상이 아무리 화려한 모습으로 세상의 가치를 강요한다 하더라도
이기심만이 세상에 남아 있는 유일한 진실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우리가 사랑을 증명하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더라도
여전히 사랑은 있다는 것이다
실로 오랜만에 상쾌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탁해졌던 시야가 환해짐을 느끼며 마음에 기쁨이 넘쳐났다
언덕을 내려오는 동안 길을 출발하던 날 들었던 음성이 생각났다
( 이 길이 끝났을 때 너는 기쁨을 발견할 것이다 )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나는 순례자였었다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확실한 느낌이 있다
신은 나를 그 자리에 홀로 놓아두었다
길위에서 철저하게 버려진 채로 고통을 겪으며
지금까지 감춰오려했던 나의 진짜 모습과 대면하도록 만들었다
이제껏 나는 인간들의 삶이란 별로 안 웃긴 농담 같은거라고 생각했다
재미를 찾으려고 하지만 결코 즐거워지지않고 나중에는 그게 어찌되든 상관없는 우스겟소리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닌것 같았다
분명히 내가 알지못하는 무언가 더 있었다
내가 찾고자 하는게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어딘가에 있다는 것 만큼은 알 수 있었다
그날 저녁 레온에 도착했다
바람은 쌀쌀했다
열려있는 중국인 가게를 하나 찾아 식사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버스터미널 근처 공터에 그동안 함께했던 지팡이와 포크를 놓아두고
마드리드를 향해 출발했다
출처: https://toleon.tistory.com/12?category=306576 [Suny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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