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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구베이야지

by Suny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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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디어에서 도구베이야지로 가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오토갈에서 1시간쯤 기다려 12인승 밴을 이용했는데

너뎃 명의 사람과 한 마리의 양이 승객의 전부였다


날씨가 좋지 않아 가을인데도 곳곳에서 소나기가 내리곤 했다

궂은 날씨 속에서 숙소를 잡고 정보를 구하기 위해 시내로 나와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현지인들에게 아라라트에 대해 물어보니

혼자서 산에 올라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본적인 등산 장비가 필요했고 현지 가이드와 그들의 차편을 이용해야 했다

혼자서 올라가보려고 했던 차라 반가운 소식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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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구베이야지를 중심으로 뒤쪽 산에는 이즈크라는 유적이 있고

앞으로는 아라라트 산이 자리 잡고 있었다

숙소에서 멀리에 보이는 이즈크라는 곳도 관심이 가는 곳이었다

다음날 구름이 개이자 숙소에서 7km 정도 떨어진 이즈크에 가보기로 했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교통편이 없어 걸어갔는데

간혹 지나가는 차들이 있어 얻어 타고 갈 수 있었다

아쉬운 대로 이즈크에 있는 산에 올라가 보았지만

정상에 올라가자 조금씩 비가 내리기 시작해 곧 내려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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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중턱에 내려와 지쳐 쉬고 있는 나에게

누군가 다가와 말(정확히는 몸짓)을 건네 왔다

느낌상 ( 같이 식사하십시다 ) 정도의 이야기인 것 같았다

그의 뒤에는 열다섯 명 남짓한 가족이 큰 텐트를 치고 솥에 뭔가를 끓이고 있었다


그는 어리둥절해 있는 나를 끌고 가 자신의 가족들을 소개해주었는데

그의 이름이 셈세티므인것은 대충 알았으나 그 이상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이들이 어찌나 개구지던지 한 명씩 인사만 하는데도 정신이 없었다


오전 내내 산을 탄 이후여서 허기가 졌다

옆 수돗가에 흰 털가죽이 벗겨져 있는 걸 보아 솥에서 끓고 있는 것은 양이나 염소인듯했다

적당히 간을 한 듯 익은 고기 냄새를 맡으니 잊고있던 허기가 밀려왔다

애써 사양하며 못 이기는 척 그들과 함께 식사를 했는데


음식이 놀랄 만큼 맛있었다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원래 재료에 별다른 조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인데

간을 해 삶은 고기에 오이와 토마토를 곁들인 것이 전부였다

예상 밖의 대접에 당황하긴 했지만 즐거운 기억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고 보면 나는 지독히도 사람들의 호의에 편안함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세상의 모든 일은 인과율로 이뤄져 있으며

호의에는 그만한 대가가 따른다는 게 내가 아는 세상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그런 법칙이 없는 것 같았고

그것이 한동안 어색하게 느껴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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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는 도구베이야지 아래의 고속도로까지 내려와

아라라트 산이 보이는 곳으로 무작정 걸어보았다

분명 멀리서 보았을 땐 산 밑에까지는 가볼 수 있겠다 싶었는데

어째서인지 아무리 걸어도 가까워지지가 않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먼 곳에 있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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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으며 생각해보니 지금껏 내가 아는 것들로부터 이만큼 멀리 떨어져 본 적이 없었다

만약 여권이나 신분증 없이 어딘가에서 죽는다면

누구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자랐고 어떻게 지금의 내가 되었는지

무엇을 해왔고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모를 것이다


그들에게 나는 단지 30세 정도의 죽은 남자 동양인일 뿐이다

나는 이제껏 나를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주체가 아닌 객체로서 마치 내가 아니기라도 한 것처럼


내가 아는 것은 지금 어딘가 낯선 곳에 던져졌다는 것

누구도 나에 대해 모르고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어떤 곳에 와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주의만 끌지 않는다면 내가 어떻게 되든 신경 쓰지 않을 세상

다시 말해 세상이 아닌 세상에 와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것은 내게 말할 수 없는 자유로움을 주었다

어떤 이질감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던 관계들에서 자신을 분리해내고

거기 존재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려주어

이제껏 가져보지 못한, 진정한 의미에서의 편안함을 주었다


세상에서 완전한 타인이 된다는 건 그런 것이다

걸음을 잠시 멈추고 그 느낌에 집중했다

그것은 매우 황홀하고 강렬해서, 언젠가 죽게 된다면

아무도 나를 찾을 수 없는 낯선 곳에서 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관계들에 갇혀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우리가 신경 쓰는 것은 온통 관계들에 관한 것이다

나 자신이 아니라 내가 관련되어 있는 어떤 것

이를테면 가족, 친구, 연인, 일, 나라, 언어, 문화, 종교, 이념 등이

우리들이 해야 할 생각을 대신 정하고 있다


우리는 거기서 벗어난 자신을 생각해보려고 하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그게 가능하다는 것을 떠올릴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불편함과 자책감을 무릅쓰고 본질적인 나를 돌아볼 용기를 내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진정한 내가 누구인지 생각해 낼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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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참을 걷다 정신을 차려보니 숙소에서 너무 멀리에 와버렸다는 걸 알았다

해가 지기 전에 돌아가려면 너무 늦기 전에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시 반대편으로 걷기 시작했지만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쯤 나는 매우 뻔뻔해져 있어서

뒤에서 차가 오는 기척이 느껴지자 운전자에게 태워달라는 신호를 보내보았다


이곳의 사람들은 순박하고 인심이 좋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그디어에서 떠날 때 탔던 것과 같은

12인승 밴을 얻어 타고 도구베이야지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아라라트산에 가보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웠지만 아무렴 어떤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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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장소에 가기 위해 오토갈로 향하는 동안

카파도키아에서 만난 여행객에게 반 호수에 관해 들은 게 생각 나 가보기로 했다

지금 있는 곳에서 남서쪽에 있는 커다란 호수였는데

그곳에 대해 아는 것은 없었지만 이름은 매우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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