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s Jung Sep 14. 2024

내 동생 - 늑대를 꿈꿨던 양

내 동생은 양띠라서 인지 정도 많고 겁도 많은 아이였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이 그토록 기다리던 아들이었기에, 무엇을 하든지 다 용납되었고 큰 기대를 받으며 자랐다. 하지만 너무 오냐오냐 자란 탓인지 사춘기를 지나면서부터 동생은 여기저기서 사고를 치기 시작했다. 나는 동생을 한심하게 생각했다. 부모님 등에 빨대를 꽂고, 한량처럼 놀면서 편하게 사는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나는 동생이 기생충 같다고 생각하며 무시하기 시작했다.



동생이 사춘기일 때, 사고만 치고 부모님이 뒷수습하느라 고생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그래서 나는 동생에게 양아치처럼 살지 말라고 했지만, 동생은 내 말을 듣지 않았다. 그 대신, 나를 때리지 못하니 내 방문을 야구 방망이로 부수기도 했다. 우리 집에서는 이런 폭력에 대해 어떤 제재도 없었기 때문에 (아마도 아빠의 폭력성이 동생에게도 이어졌기에 부모님도 뭐라고 할 수 없었던 것 같다), 동생에게 관심을 거두었다. 



반면에, 우리 언니는 동생에게 싫은 소리 한마디 하지 않고 다 받아주며 용돈도 주곤 했다. 그래서 동생은 언니에게 함부로 대하면서도 의지하기도 했다. 나는 좋고 싫음을 얼굴에 드러내는 성격이라, 동생과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눈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 결과, 동생이 무슨 일을 하고, 생계를 어떻게 꾸려나가고, 자기 가족을 어떻게 부양했는지도 잘 알지 못했다. 동생의 죽음 이후, 엄마, 아빠, 언니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동생이 얼마나 외롭고 고독했을지 짐작하게 되었다. 동생은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혀 힘든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엄마의 말에 따르면 동생은 어릴 때부터 공부에 흥미가 없었고 공고에 가고 싶어 했지만, 부모님은 아들이니 대학을 나와야 한다는 생각에 결사반대했다고 한다. 결국 동생은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결석이 잦아 퇴학 경고를 받았고, 엄마가 동생을 학교에 데려다주며 교문 앞에서 지키기도 했다. 부모님의 헌신 덕분에 동생은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대학에서 뭘 하고 싶은 마음도 없어서 부모님이 정한 학교에 입학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군대에 갔고, 부모님은 군대가 동생을 성숙하게 만들어 미래 계획을 세울 기회를 줄 거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동생은 군 복무 중 사귀던 여자친구가 임신을 하면서 제대하며 바로 결혼하게 되었다. 부모님은 아이가 생겼으니 책임을 져야 한다고 결혼을 강행했고, 결혼을 통해 동생이 더 책임감 있는 사람이 되길 바라셨다. 나도 동생의 결혼식에 맞춰 영국에서 나왔었는데, 결혼식 전날 한숨을 쉬던 동생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하지만 준비되지 않은 채 등 떠밀려 한 동생의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고, 결국 몇 년 되지 않아 이혼했다. 부모님은 큰 딸에 이어 아들마저 이혼해 큰 상처를 받으셨고, 동생도 잘해보고 싶었지만 생각처럼 되지 않은 결혼 생활과 부모님께 실망을 끼쳤다는 생각에 속이 많이 상했던 듯하다. 그래서인지 착실하게 일해서 돈을 모으고 사는 것보다는 빨리, 크게 한탕해서 부모님께 인정도 받고 남들에게도 뭔가 보여줄 수 있는 걸 원했다.



부모님은 어려서부터 동생이 원하는 것들은 웬만하면 다 사주셨기 때문에 수입이 일정치 않아도 자기가 갖고 싶은 것들은 그냥 카드로 샀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카드값을 부모님이 갚아주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나는 이 상황이 한심하다고 생각했고, 언니와 통화하면서 동생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나잇값을 못한다고 답답해하기만 했다.


동생은 다시 재혼했지만, 부모님의 지원은 여전했다. 나는 몇 번이나 부모님께 그만하라고 했지만, 아들에 대한 부모님의 마음을 바꾸기는 어려웠다. 동생은 사업이 잘 될 때 부모님께 용돈도 드리고 선물도 했지만, 그 기간은 짧았고 결국 점점 더 위축되었고 술과 담배로 자신을 망가뜨리며 고립되었다.



결국 동생은 마흔 살이라는 짧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나는 동생이 부모님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갑작스러운 동생의 죽음은 큰 충격이었고 너무나도 아팠다. 초등학생 때 슈퍼맨을 보고 망토를 쓰고 담 위에서 뛰어내리다 다리가 부러졌던 동생의 모습이 떠오르며, 이상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본인도 부모님께 손 벌리지 않고 뭐라도 해 보고 싶었을 텐데 일이 풀리지 않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어 안타깝기도 하다. 자기가 원했던 길을 가지 못하고 부모님의 기대에 맞춰 살려다 결국 튕겨져 나갔던 동생에게 나는 상담을 받아보라는 말만 했을 뿐 누나로서 도움을 주지 못해 미안함만 남는다. 그래도 아프지 않고 갑자기 죽었기에 그나마 다행이다 싶다가도 왜, 그렇게 허망하게 죽었나 싶어 불쌍하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에베소서 4장 32절 



동생이 죽어 안타깝지만 동시에 어이없게도 더 이상 부모님이 동생한테 돈 안 줘도 되니 다행이다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자식을 가슴에 묻고 사는 부모님은 아들이 살아 있을 때 더 많이 못해줘서 아쉽다고 하니 나는 그 마음의 깊이가 얼마나 깊은지 추측만 해 볼 뿐이다. 동생이 죽고 나서야, 올케와 이야기를 하며 동생이 늘 올케에게 "사랑한다", "네가 최고다"라고 말해주던 사람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가족이었지만 나는 동생에 대한 안타까움보다는 한심하다는 낙인을 찍고 동생에 대해 더 알아가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게 미안하다.




이전 06화 천사 같은 언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