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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s Jung Sep 07. 2024

천사 같은 언니

내가 초등학생일 때 우리 집은 목욕탕을 했다. 아빠가 지은 목욕탕 건물 위층은 우리 집이었고 아래는 목욕탕이었다. 엄마는 갓난아이인 동생을 데리고 카운터를 봤고, 언니는 학교가 끝나면 목욕탕에 내려와 엄마를 도와주고 요구르트와 바나나우유 같은 것들도 팔았다. 나는 돈 개념도 없어서 도움이 되지 않아서 집에 있어야 했다. 가끔 언니에게 요구르트나 우유가 먹고 싶다고 하면, 언니는 몰래 하나씩 가져와서 나에게 주곤 했다.



어렸을 때 나는 공부에 관심이 없고 노는 것만 좋아해서, 개학하기 하루 이틀 전부터는 학교 가기 싫다고 울기만 했다. 당시 국민학교에서는 ‘탐구 생활’이라는 문제집 같은 방학 숙제가 있었는데, 나는 노느라 정신이 없어 매번 제대로 하지 않았고, 엄마와 언니는 내 숙제를 해주기 위해 개학 전에는 늘 밤늦게까지 숙제를 해주곤 했다. 나는 언니가 내 숙제를 해주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언니는 본인이 내 숙제를 해줬다는 것에 대해 단 한 번도 자랑하지 않았다.



아빠는 언니에게 새로운 것들이 나오거나 예쁜 것들을 보면 사다 주곤 했는데, 아직도 기억나는 것 중 하나는 당시 양털 무스탕 장갑이 나오기 시작했을 때 아빠가 백화점에서 언니 선물로 사다 주신 것이다. 보송보송한 하얀 털이 너무 예뻐서 내가 그 장갑을 달라고 했지만, 아빠는 그걸 보고 나에게 엄청 화를 내셨다. 아빠는 언니가 너무 순해서 좋은 것들을 동생에게 다 뺏긴다고 안타까워하셨던 것 같다. 그 다음날 아빠는 언니 장갑 쓰지 말라며 나에게도 장갑을 사다 주셨는데, 내 장갑은 털이 꼬불꼬불하고 회색인 딱 봐도 싼 티가 나는 장갑이었다. 예쁘지 않아서 한 번도 안 꼈는데 양털 장갑을 보면 그 시절 생각이 난다.



아빠는 언니에게 큰 기대를 걸었고, 언니가 학교에 가기 전부터 아빠가 앉혀놓고 공부를 가르쳤다고 한다. 언니는 아빠한테 혼나는 게 무서워서 매일 코피를 흘리면서 공부를 했다고 한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언니는 전교 1, 2등을 했지만,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공부에 흥미를 잃고 소위 말하는 '날라리'가 돼서 친구들과 놀러 다니곤 했다. 아빠의 기대가 큰걸 알았기 때문에 성적이 떨어진 것을 부모님께 숨기다가, 엄마가 고3 진학 상담을 하러 가서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을 못 갈 성적이라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고 집에 오셨다. 엄마는 언니에게 어떻게 하냐고, 아빠가 알면 난리 난다고 하면서 우선 서울에 있는 대학에 원서를 쓰자고 했다. 원래 대학에 갈 성적이 안 됐기 때문에 담임도 그냥 원서를 써줬는데, 그걸 몰랐던 아빠는 언니가 대입에 실패하자 너무 큰 충격을 받으셨다. 언니는 결국 재수를 했고, 그다음 해에 수원에 있는 전문대에 합격해서 다녔는데, 아빠를 실망시켰다는 마음에 언니는 늘 마음의 부담을 지고 살았던 것 같다.



언니는 부모님의 엄청난 기대가 숨이 막혔는지 대학 졸업하고 회사를 다니다 얼마 안 있어 결혼을 했다. 언니가 결혼할 형부를 데리고 왔을 때, 아빠는 눈에 차지 않는 형부를 보고 돌아 앉아 쳐다도 보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도 결혼했지만 결혼 생활이 생각만큼 순탄치 않았고 얼마 되지 않아 이혼을 했다. 언니는 그 기간 동안 한 번도 부모님께 결혼 생활이 힘들다, 이혼하고 싶다는 말도 하지 않았고 그래서 언니가 이혼 서류를 접수하고 부모님께 이혼했다고 했을 때 엄마, 아빠는 몸져누우셨다. 아빠는 착하디 착한 장녀가 이혼했다는 사실이 충격이었고 엄마는 남들이 뭐라고 할까 전전긍긍하셨다. 지금도 그렇지만 20여 년 전에는 이혼했다고 하면 쉬쉬하고 말하지 않는 분위기여서 언니도 힘들지 않았을까 싶다. 언니가 친정으로 돌아왔을 때, 언니가 느꼈을 벽은 얼마나 높았을까 감히 상상만 해본다.



언니는 딸의 양육권만 요구하고 모든 걸 포기하고 나왔다. 부모님의 기대를 알았기에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늘 죄인처럼 지냈다. 언니가 부모님 근처에 자리를 잡고 일하면서 월급은 모두 부모님을 위해 썼다. 나는 월급을 받아도 부모님께 드린 적도 없지만 언니는 매일 장을 봐서 부모님 댁으로 와서 식사 준비도 했고 쓰레기 분리수거와 청소까지 도맡아 했다. 언니는 그렇게 사는 게 엄마, 아빠를 실망시킨 자식의 도리라고 생각했던 듯하다. 그래서 언니가 뇌종양으로 쓰러져 병원에 있는 지금, 부모님은 언니의 부재를 너무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언니가 있었으면 이것도 해줬을 거고 저것도 해줬을 거라는 엄마, 아빠의 말이 가슴 아프다.



남동생은 누나 때문에 아빠 회사가 전남편에게 넘어갔다고 타박을 주곤 했다. 실은 아빠도 나이가 드셔서 더 못하실 것 같아 형부랑 같이 일을 하다 형부에게 넘겨주셨는데 이혼과 겹치면서 동생은 형부가 위자료처럼 그 일을 맡게 된 것처럼 오해했다. 오해라고, 아니라고 동생에게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고, 자기 생각은 단 한 번도 소리 내어 말해보지 못하고 부모님을 위해 산 언니가 나는 참 안쓰럽다. 이혼하고 십여 년이 지나 재혼을 했는데 결혼식을 하지도 않고 형부와 혼인 신고만 하고 살았다. 언니는 이혼한 것도, 재혼한 것도 늘 미안해하며 살았다. 언니는 과연 행복했을까? 천사 같은 딸이란 소리가 언니에게는 너무 큰 부담이 아니었을까? 나하고 자주 통화도 했지만 언니는 엄마, 아빠가 나이가 드셔서 힘들어하신다, 안쓰럽다는 말만 했다. 난 늘 언니에게 제발 부모님 그늘에서 나와 멀리 가서 편하게 살라고 했지만 언니는 "알았어", "그래야지"라는 말만 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장 28절




뇌종양 수술 후 병원에 누워 있는 언니를 보면 이제 엄마, 아빠 눈치 안 봐도 되고 엄마, 아빠를 위해 24시간 비서처럼 살지 않아도 돼서 편하겠네 싶다가도 어린 아이 지능으로 “아파, 아파"라는 말만 하는 언니를 보면 이제는 그만 아프고 쉴 수 있었으면 싶기도 하다. 여전히 언니가 기적처럼 다시 일어나기를 바라는 부모님과 우리의 이기적인 바람 때문에 언니는 오늘도 이 세상에 한 발을 걸치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내게 편지도 자주 써주고, 소포도 보내주고, 카톡도 보내주던 친구보다 더 가까웠던 언니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아프고 슬프지만, 그래도 숨을 쉬고 있어서 우리 식구 모두가 갑작스레 동생을 잃은 아픔과 충격을 피하고 이 서서히 상실을 준비할 수 있게 해주는게 아닌가 싶다. 내게는 천사였던 언니, 그런 언니가 내 언니라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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