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부영의 분석심리학 3부작을 읽고
작년 10월, 지금은 내 마음의 작은 섬이 되어준 친구들과 분석심리학 공부를 시작하였다. 심리학으로 대학원 진학을 생각해 보기도 하였던 나는 ‘이제 와서 무슨 대학원이냐, 지금 당장 삶도 바쁜데 심리학은 사치지.’ 하고 생각하고 마음을 접었던 적도 있었다. 그러다 운명처럼 한 분이 심리학 공부 모임을 주최해 주셨고, 나는 너무 좋아 덥석 모임을 시작하게 되었다.
우리가 처음 선정하여 읽은 책은 ‘이부영의 분석심리학 3부작’ 이었다. 이 책은 칼 융의 분석심리학 이론을 설명하고 한국인의 신화와 특성에 맞게 풀어서 쓴 책이다. 융은 사람의 정신이 3가지 요소, 의식과 무의식 그리고 집단 무의식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았다. 의식은 말 그대로 우리가 스스로를 의식하고 있는 자아(ego)이고, 무의식은 한 개인에게 억눌려 있는 정신과 기억, 마지막으로 집단 무의식은 인간이 하나의 ‘종’으로서 공통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경험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설명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의식이 억눌려 있다고 해서 충동의 창고이자 더러운 욕구로 가득 찬 곳이 아닌 마음을 성숙케 하는 ‘창조의 샘’이라는 것이다.
이 분석심리학 3부작은 제1권, 그림자. 제2권, 아니마와 아니무스. 제3권, 자기와 자기실현으로 구성되어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롭게 읽은 책은 제1권, 그림자 였다. 분석심리학의 목표는 ‘자기실현’이다. 본인의 그림자와 아니마, 아니무스를 발견해 내고 인정하고, ‘나’에게 긍정적으로 통합하는 것. 또한 내 안의 무의식을 의식화하여 ‘완벽한 나’가 아닌 ‘온전한 나’가 되는 것이 자기실현의 과제일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림자’란 무엇인가? 그림자란 무의식의 의식화 과정에서 제일 먼저 만나는 (만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그림자는 무의식의 열등한 인격자 나=자아의 어두운 면이다. 그림자는 흔히 다른 사람에게 투사되는 경우가 많은데, 어떤 사람의 특성 중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렇지 않는 면이 나에게는 계속 신경이 쓰이거나 꼴 보기 싫다면 이 경우 ‘나의 그림자’가 상대방에게 ‘투사’된 경우가 많을 것이다. 이 경우 우리는 상대방을 계속 미워하기만 하는 부정적인 에너지를 쓰기보다는, 그것이 ‘나의 그림자’임을 의식하고, 인정하고 이를 건설적인 기능으로 바꾸어 쓸 수 도 있을 것이다.
잠깐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이 부분을 읽으면서 곧바로 한 사람이 떠올랐다. 그 사람을 볼 때마다 사람이 왜 저렇게 과시적일까, 어쩜 저렇게 자기중심적이고 본인한테 빠져있을까. 하고 SNS를 볼 때마다 눈살이 찌푸려졌다. 천천히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니 나에게 있는 과시적인 성향과 자기중심적인 성향이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이 되었고, 그대로 상대방에게 투사되어 좋지 않은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책에도 나와있지만 이렇게 내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나의 일부분을 들여다보고 인정하기란 쉽지 않다. 또한 이것을 의식화했다고 해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그것은 어려운 문제이고 나 역시 아직 사투를 벌이고 있다. 하지만 이를 인정하고 더 ‘나(Self)’에 가까워 지는것 이야말로 우리 인생의 과제 일 것이다. 그림자 문제는 하나의 그림자를 내가 발견했다고 해서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살아 있는 한 그림자는 계속해서 만들어지게 마련이고 이 문제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항상 그림자의 반대편에는 빛이 있고, 그 속에는 창조와 성숙의 씨앗이 있다는 것 일것이다.
다음으로, 제2권 ‘아니마와 아니무스’. 이 부분 때문에 융이 페미니스트들에게 많은 짙타를 받기도 하였고, 나 역시 책을 읽으면서 온전히 흡수하기가 쉽지 않았다. 먼저, 설명을 해보자면 아니마는 남성 속의 여성 인격, 아니무스는 여성 속의 남성 인격을 말하는 것이다. 내적 인격이란 외적 인격(페르조나=가면)과 대응되는 개념으로, 무의식의 인격을 말한다. 즉, 남성의 무의식의 내적 인격은 여성적 속성을, 여성의 무의식의 내적 인격은 남성적 속성을 띠게 된다는 것이다. 원초적 여성성은 ‘감성’으로 표현될 수 있으며, 남성성은 ‘논리’의 특성으로 표현된다.
아니마 아니무스를 처음 읽을 때 든 생각은 ‘이게 무슨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같은 소리 인가’였다. 요즘처럼 남녀의 능력이 구별되지 않는 세상에서 여성성을 ‘감성’으로, 남성성을 ‘논리’로 표현한 것은 너무 구시대적이고 일차원적인 생각이 아닌가 싶었다. 이를 남녀의 구별이 아닌 개개인의 사람의 특성으로 구별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일부는 수용이 되기도 하였고, 상담 선생님과 이야기를 하면서 단순히 아니마 아니무스를 생물학적인 개념의 ‘남성성’, ‘여성성’ 으로 구분짓이 않기로 생각하게 되었다. 이름은 A/B, 나무성/바람성 처럼 그저 이론화하기 위한 개념일 뿐이라고 스스로 결론짓게 되었고, 그 이후로의 진도가 훨씬 수월했다. 중요한 건 우리는 두 가지의 특성 모두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문제는 얼마나 두 가지 특성을 조화롭게 발전시켜 나가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모든 인간은 감성과 이성을 지닌 존재이다. 나의 감성이 너무 많은 힘을 쓰고있지는 않은지, 나의 이성이 너무 많은 힘을 쓰고 있지는 않은지 그저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며 본래 지혜로운 나 자신에게 다가가면 될 뿐이다.
제3권, 자기와 자기실현. 흔히 우리는 ‘자아실현’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해왔다. 하지만 분석 심리학에서 말하는 ‘자아’란 내가 인식하고 있는 극히 일부분일 뿐이고, 우리의 전체 정신인 ‘자기’를 실현하기 위해 구별되는 용어로 ‘자기실현’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자기실현은 노력과 고통이 수반되기도 하지만 엄청나게 특별한 것은 아니다. 그저 ‘평범한 개인의 행복’을 찾아가는 과정일 뿐이다. 이 책에서는 동양의 신화와 민담을 소개하며 자기실현의 과정을 예를 들어 설명해주기도 하고 상담자의 꿈을 분석한 내용을 소개해 주기도 하는데, 개인적으로 신화를 풀어놓은 글은 흥미가 잘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인상 깊었던 부분은 불교의 ‘십우도’ 와 자기실현을 연관 지어 설명해 놓은 부분이었다.
십우도는 수행과 깨달음의 단계를 ‘소를 찾는 과정’에 빗대어 열 가지로 그린 그림이다. 열 가지 소의 그림이라고 하여 ‘십우도’라고 하기도 하고, ‘찾을 심, 소 우’를 써서 ‘심우도’라고도 불리운다. 책의 내용을 요약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소를 찾다
소를 찾는 다는 것은 ‘자기’를 찾는 것이다. 그 시작의 마음가짐을 첫번째 그림에서 설명하고 있다. 무의식으로의 긴 분석 여행의 시작.
발자국을 보다
자기의 발자국은 의식계에 남기는 무의식의 발자국들이다. 경험적 발자국과, 우리가 매일 꾸는 꿈 등이 있다.
소를 보다
진실한 자기에는 돌아가지 못했지만 그것을 하나의 대상으로서 만나는 경지며, 무의식은 실제로 존재하다는 것을 몸소 깨닫는 순간이다.
소를 얻다
소를 얻는다 함은 무의식과 함께하는 삶의 시작이다. 하지만 무의식은 우리가 집중하지 않으면 쉽게 사라지기 때문에 집중을 늦춰서는 안된다.
소를 기르다
깨달음을 얻은 뒤에 하는 수행의 뜻으로 ‘목우’라는 말을 사용한다고 한다. 이 단계에서는 수행의 목표에는 달성했으나, 끊임없이 자아와 무의식의 관계를 긍정적으로 유지하는 수행을 해야한다.
‘전체정신인 자기에 가까이 가면 괴납련 화상이 시에서 읊었듯 ‘흙먼지 속에 있다 해도 더럽힘 받는 일 없고 되풀이해 오고 가며 실수를 거듭한 덕택에 숲에서 사람을 만나도 그저 덤덤할 따름’인 사람이 된다.’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다
마음의 근원, 즉 자아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소는 개인의 전체성으로 이끌어주는 인도자일뿐이다.
소를 잊고 사람만 남다
자아가 ‘자기’로 돌아오고, 인도자가 인도자의 역할을 다 한 이상 더이상 인도자는 필요하지 않다. ‘우리가 상징의 의미를 남김없이 해석했다면 그 상징은 생명을 잃는다.’
이 단계에서는 ‘자아의 팽창’을 주의해야 한다고 한다.
소와 사람 둘다 잊었다
이제 비로소 하나인 마음이 된 상태. 대극이 하나의 전체를 이룬상태이다.
여기서 소와 사람 둘 다 잊었다 할때 ‘잊는다’는 말은 ‘잃는 것’과는 다르다. 자아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자기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자기에 대한 집착을 잊는 상태이다.
본래의 근원으로 돌아가다
자기실현이 된 경지이다. ‘자기’또한 그 자체로 있는 하나의 자연이다.
시중으로 들어가 중생을 돕다.
도의 경지에 이른 사람은 성인들도 알아보지 못한다. 그저 평범한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나는 사람마다 모르는 척 할 수 있다면
미륵의 누각문이 활짝 열리네’
만나는 사람마다 손 붙잡고 위로하고 사랑해주기 보다 ‘모르는 척 할 수 있을때’ 진리의 세계가 열린다고 한다. 서로 이해에 얽혀 사랑과 미움의 난장판을 만들지 않는 깨달은 자의 ‘서늘한’ 인간관계 라고 표현되어있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이 발자국을 보고 있는 것인지, 소를 보고 있는 것인지 아직 분간이 어렵다. 하지만 이 책을 시작으로 나와 소를 모두 잊을 때까지의 여정을 떠나보려 한다. 그리고 이 책은 그런 나에게 좋은 길잡이가 돼주었으므로 책을 추천하며 글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