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틴이고 뭐고 다 무너졌을 때

by 김애정

*이 글의 제목인 <루틴이고 뭐고 다 무너졌을 때>는 팟캐스트 <여자 둘이 토크하고 있습니다>의 166번째 에피소드에서 가져온 것임을 밝힙니다.


올해 가을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정신을 차려보니 겨울이고, 조금 숨통이 트이니 연말이다. 지난 9월부터 새로운 일 준비를 시작했다. 그 와중에 학점은행제를 통해 시작한 공부가 생각보다 품이 많이 들어가서 하루에 1-2시간 정도는 꼬박 투자를 해야겠다. 본업까지 하면서 두 가지 일을 함께 하다 보니 정말 하루를 분 단위로 쪼개서 살았던 것 같다. 자연스럽게 다른 것에 신경 쓸 여력은 없었다. 달리기와는 멀어졌고, 가장 큰 변화는 독서량이 뚝 떨어졌다. 매일 오전 습관처럼, 휴식처럼 읽던 책들에서는 손을 떼게 되었다. 어쩌다 여유가 생겼다고 착각하고 책을 손에 들면 이때다 싶어 해야 할 일들이 생각나서 다시 분주함 속으로 들어갔다. 집안꼴은 엉망이 되었다. 이것저것 잡다한 것들이 제 자리를 찾지 못한 채 나도 모르는 사이 새로운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 와중에 그래도 꼬박꼬박 지킨 것은 8시간 수면과 일주일에 한 번 가는 PT였다. 8시간 수면을 지킨다고 하면 정말 바쁜 게 맞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수면시간은 포기할 수가 없었다. 수면시간을 줄이면 바로 몸에 신호가 왔다. 몇 개월간 그 모든 것들을 버티게 해 준 것은 8시간의 수면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수면의 질이 좋았던 건 아니다. 지난 몇 개월간 은은한 불안은 항상 나의 옆에 자리 잡고 있었다. 마치 여기가 제자리라는듯이. 5-10분이라도 잠깐 쉴 시간이 생기면 불안했다. 나는 지금 이렇게 쉬면 안 되는데. 이동 중에도 항상 할 일이 있어서 일처리를 해야 하는데, 지금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가 있는 거지? 그렇게 불 안 해하다 보면 그 5-10분이 지나있었고, 다음 할 일이 생각났다. 자다가도 일어나서 다음날 스케줄 생각을 했고, 늦잠은 사치였다. 일어나자마자 할 일이 생각났다. 내가 정말 싫어하는 ‘서류 작업류’의 일들을 꼭 해야만 했고, 하나하나 처리해 갔다.


그래도 겨우 시간을 내서 PT를 가면 선생님은 나의 투정을 받아줬다. 어디 가서 투정을 부리는 편은 아닌데, 그렇게 힘든 하루 끝에 운동을 하면 투정을 부리게 되었다. ‘오늘 진짜 힘들었어요. 여기 온 게 기적이에요.’, ‘오늘은 너무 힘들어서 그냥 적당히 하면 안 될까요?’ 그럼에도 나를 적당히 달래가며 ‘한 세트 더’를 외치는 직업의식이 투철한 선생님. 다른 사람이 들으면 이 정도가 뭐가 투정이냐 싶겠지만, 나 또한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아이들이 ‘오늘은 너무 피곤해요.’, ‘공부하기 싫어요.’라고 하면 나는 잘 받아주는 편이 아니기 때문에 그게 좀 미안하게 느껴졌다. 아이들이 그렇게 말하면 나는 ‘얘들아, 공부를 선생님을 위해서 하는 게 아니잖아? 어차피 공부하러 왔는데 안 하면 너네 손해야. 그리고 너네가 이렇게 피곤해하면 선생님도 피곤하지 않겠니?’라고 냉정하게 말하면 나였다. 그래서 선생님에게 말했다. “제가 너무 투정이 심하죠? 갑자기 죄송하네요. 운동하는 것도 다 절 위해서 하는 건데.” 근데 선생님이 예상치 못한 말을 했다. “아니에요, 회원님 정도면 투정도 아니죠. 그리고 저는 그것까지가 저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그것까지가 자신의 역할이라고 생각하던 선생님과 그건 나의 역할이 아니라고 생각하던 나. 그날 저녁 또 의미 없는 반성을 했다. 하지만 그렇게 직업의식 투철한 선생님이라고 항상 감사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어느 날은 마사지를 해주시면서 “회원님 스트레칭 잘 안 하시죠? 하루에 5분만 투자하세요. 저는 하루에 5분도 못 내는 건 핑계라고 생각해요.” 직장 다니면서 새로운 일을 준비하고, 새로운 자격증까지 공부하면서도 스페인어 스터디도 빠지지 않고, 추가로 개인과외까지 하고, 일주일에 한 번 미술수업까지 가면서 아등바등 하루를 버티고 있는 나에게 5분을 못 내는 게 핑계라고 말하는 이 사람에게 뭐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그 많은 일들을 누가 하라고 한 것도 아니었다. 다 내가 선택한 것들이었다.


12월 중순이 되어서야 조금씩 여유가 생기고 있다. 자격증반은 잠시 방학을 맞이하였고, 미술수업은 끝났고 새로운 일 준비는 끝났다. 오랜만에 뜨개모임 친구를 만나 뜨개도 하고, 오늘은 책도 읽었고 그동안 바빠서 소홀했던 글도 한편을 써본다. 물론 아직 불안감이 없어진 건 아니다. 이렇게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책을 읽는 시간이 어색하다. 루틴이고 뭐고 다 무너져 내렸지만, 다시 조금씩 내가 사랑하던 루틴들을 찾아서 데려와야지.

keyword
작가의 이전글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