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빨간색이랑 초록색 중에 골라보세요." 아무 생각 없이 간 전 회사 동료들과의 송년회 자리에서 한 친구가 물었다. 응? 이 무슨 <매트릭스> 알약 장면에 나올법한 대사람. 영 맥락을 파악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또 그 와중에 난 대답을 했다. “초록색이요!” 잇따라 다른 이들도 대답을 했고, 방으로 간 그녀는 산타처럼 팔에 쇼핑백들을 주렁주렁 걸고 나타났다.
쇼핑백 속 상자 안에 들은 것은 아주 귀여운 초록색 찻잔 세트였다. 빨간색을 고른 친구에겐 붉은색의 찻잔 세트를 건네주었다. “크리스마스 선물이에요!” 하며 해맑게 웃는 그녀의 얼굴을 어찌 잊으랴. 이후로도 몇 번 더, 난 준비하지도 생각하지도 못한 그래서 더욱 뜻밖이었던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았다. 예상치 못한 선물은 놀라움과 기쁨, 그리고 미안함의 손을 잡고 함께 온다.
“어떡해, 난 아무것도 준비 못 해서.. 이럴 줄 알았으면..” 알았으면? 누군가 내게 선물을 줄 것을 알았어야만 준비했을 것이란 뜻인가. 그것밖에 안 되는 마음이 스스로 너무나 옹졸하게 느껴졌다. 애초에 생각을 하지 못한 무신경하고 둔한 마음도 원망스럽고 부끄러웠다. 엄마는 늘 내게 마음이 넓은 사람이 되어라 하셨는데, 언제쯤 될 수 있을까. 아마 지금부터?
2.
중독처럼 하던 인스타그램을 급작스레 떠났다. 그것이 1년 전, 2020년 11월 말. 그리고 얼마 전 1년 여만에 인스타그램에 피드를 올렸다. 뭐, 그게 그렇게나 별 일이냐고 묻는다면 할 말 없음. 하지만 내게 그것은 그렇게나 별 일이었다. 떠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중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한 가지는 비교였다. 남들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그로부터 시작되는 자신과의 비교.
염탐을 하고 당하며 이상한 강박이 생겼다. 어딜 가든, 무엇을 하든, 나의 일상을 모두 스토리와 피드로 남겨야 한다는 것. 할 것이 많고 정신이 건강하던 시기엔 일련의 과정이 다 재미있었다. 그러던 2021년 여러모로 마음이 시끄러웠던 시기, 내 일상은 더 이상 누군가와 공유할 만큼 흥미로운 것이 없었는데 남들은 아니었다. 정사각형과 직사각형 속 그들은 왜 그렇게들 즐거워 보이던지.
그래서 떠났다. 다시 돌아간 날은 공교롭게도 크리스마스 당일. 날짜엔 큰 의미가 없었다. 그저 그날 마음이 동했을 뿐. 사실 조금-어쩌면 나도 모르게 많이-걱정스러웠다. 이것이 다시 날 비교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게 되면 어떡하지 하며. 다행히 1년 간 꽤나 단단해진 마음은 더 이상 그들과 나 자신을 재고 판단하지 않았다. 너는 너, 나는 나. 단지 그뿐이었다.
3.
2년을 묵혀둔 사과를 했다. “오랜만이야. 미안했어. 나도 알아, 너무 늦었지. 넌 아마 잊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난 언젠가 그때 미안했다고 꼭 말하고 싶었어. 즐거운 크리스마스 보내길.” 7시간 후. 메시지가 왔다. 손끝이 괜히 찌릿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긴장 한아름 안은 마음으로 클릭. "메리 크리스마스! 괴로워하지 마. 나는 다 이해해. 다시 연락해줘서 고마워."
이 사과에는 긴 이야기가 얽혀있다. 당시엔 그저 끝이 났다는 해방감 하나에 취해 있었고, 때문에 내 감정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아니, 돌볼 생각이 없었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그렇게 정리하지 못하고 덮어둔 감정 위로 다른 것들을 쌓고 쌓으니, 밑에서는 곪아 악취가 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마음을 다시 돌아볼 용기는 그와 정확히 반비례해 가고 있었고.
그러다 문득, 언제까지 이렇게 모른 척하고 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흘긋거리는 것조차도 괴롭던 그 해묵은 감정을 2년 여 만에 들춰보았다. 제대로 보내주기로 했다. “네가 사과를 받아줘서 정말 기뻐. 나 많이 망설였었거든.” 이렇게 끝.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안도의 한숨. 이제야 벗어났다. 잘 가. 이젠 정말 행복했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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