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플라워> 찰리와 앤더슨 선생님의 대화
"지민, 지민.. 이름을 누가 지었어? 이름이 좋네."
지난주 신년을 맞아 엄마와 새해 신수를 보러 갔다. 엄마가 때마다 가는 절에 계신 스님에게. 중요한 일을 치르기 전 -대개 일을 새로 시작한다거나 끝낸다거나 이사를 간다거나 이번처럼 새해가 되었다거나- 엄마는 꼭 스님에게 가 조언을 구했고, 난 그때마다 “아니, 무슨 스님이 운수를 봐. 땡중이네” 하며 핀잔을 줬지만, 피는 못 속인다고, 나도 언제부턴가 사주를 보고 운세 보는 것을 즐기기 시작했다.
어찌 됐든 이리하여 나는 새해벽두부터 엄마를 따라나섰다. 그날 들은 말 중 크게 와닿은 것은 없었다. 나는 벽돌을 허투루 쌓는 타입이 아니라 속도는 조금 느리더라도 제대로 쌓아가는 사람이라고 했고, 그냥 두면 알아서 잘한다고 한 정도의 별 영양가 없는 이야기가 전부였다. 그러다 스님이 갑자기 내 이름을 두 번 입으로 되뇌었다. 그리곤 좋은 이름이라고 했다. 기분이 묘하게 이상했다. 아직도 그게 무슨 기분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때는 바야흐로 일천구백구십구 년. 초등학교 3학년 지민이의 반엔 지민이가 있었다. 아니 나 말구. 한지민, 정지민, 그리고 또 다른 지민이가 있었다. 남자였다. 심지어 성도 같은, 박지민이었다. 맙소사. “야, 박지민!” 불러서 돌아보면 “아니, 너 말고~” 하곤 지들끼리 재밌어 죽겠다며 웃는 남자아이들의 모습이 그려지는가. 20여 년이 지났는데도 이 장면이 이리도 생생한 걸 보면 어린 나이에 짜증이 오죽 많이 났었나 보다.
세상 유치찬란한 장난을 하루가 멀다 하고 당하던 초등학교도 이내 졸업을 했다. 중고등학교와 대학 시절엔 이름에 대한 큰 기억이 없는 걸 보니 뭐 노느라 바빠서 이름엔 신경 쓸 겨를도 없었나 보다. 대학 졸업 후 첫 회사에 취업했을 즈음엔 오디션 프로그램이 한창 성행이던 때였다. K팝스타 첫 시즌이 방영을 하던 시기였고, 입사 후 각 부서들을 돌며 인사를 하는데, 모 팀의 차장님이 내 이름을 듣곤 되물으셨다. “어? K팝스타 박지민?” (당연히) 아니요!
그리고 이젠 방탄소년단의 지민까지. 아니, 이 친구도 성까지 똑같아. 또 박지민이야. 심지어 한국을 가뿐히 넘어 세계적인 아이돌이 되어버린 그룹의 멤버라니. 이제 학생들은 내 이름을 듣곤 BTS 멤버 지민이를 떠올린다. 이처럼 동명이인이 줄을 선 내게 이름이란 나만을 지칭하는 고유의 것이 아니게 되어버린 지 오래다. 그러다 보니 이름이라는 것에 큰 애정이 없었다. 맞아. 난 내 이름을 한 번도 좋아한 적 없었다.
‘나를 좋아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자존감 지킴이 영화 전문 감독 스티브 크보스키의 영화 <월플라워> 속 대화가 생각났다. 극 중 주인공 찰리는 친누나 캔디스가 남자 친구 데릭에게 데이트 폭력 당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또 자신이 짝사랑하는 친구 샘이 그녀를 존중하지 않는 남자와 사귀는 것을 보고 마뜩잖아한다. 어느 날 영어 수업이 끝나고 찰리는 선생님에게 묻는다.
찰리: 앤더슨 선생님, 뭐 좀 여쭤봐도 돼요?
앤더슨: 얼마든지.
찰리: 왜 사람들은 자기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는 걸까요?
앤더슨: 구체적 대상이 있는 이야기니?
(찰리가 눈짓으로 수긍한다)
앤더슨: 우리는 자신이 받을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사랑을 받아들인단다.
찰리: 자신이 더 가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줄 수 있을까요?
앤더슨: 시도는 해 볼 수 있지
(찰리가 웃으며 돌아선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만큼의 사랑만 받을 수 있다니.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여운이 바닥에 가라앉았다가 다시 떠오르도록 만드는 한 줄이다. 영화는 십 대 소년과 소녀들이 힘껏 헤매고 방황하는 이야기를 다룬 청춘 영화지만, 삼십 대가 훌쩍 넘은 내 마음에도 여전히 와닿아 울렸다. 한 번도 내 이름을 좋은 이름이라고 생각해보지 않은 상태에서 들은 스님의 저 한 마디는 멍 때리고 링 위에 서 있는 내게 들어온 한 방의 훅 같았다.
내가 나를 예뻐하지 않으면 누가 나를 예뻐하겠어. 내가 나를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누가 날 그렇게 생각하겠어. 내가 나를 오롯이 좋아하지 않으면 누가 나를 온전히 좋아하겠어. 여전히 내 이름이 발에 채이고 채이는 이름들 중 하나라는 사실은 변함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내 이름을 소중히 여기고 좋아한다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이름은 퍽 흔할지언정 그 이름으로 불리는 ‘나’는 세상에 둘도 아니고 딱 하나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