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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영 Sep 14. 2024

기억과 재판

증인의 말을 오롯이 믿을 수 있을까?

'오늘 점심에 뭘 먹었더라?'


저녁 메뉴를 정하기 전 늘 하는 생각이지만, 이따금 골똘하게 생각해 봐도 바로 몇 시간 전 밥상이 생각나지 않을 때가 있다. 하물며 며칠, 몇 달 혹은 몇 년 전 점심 메뉴를 정확히 기억하는 건 가능할까?


재판 증인신문도 별다르지 않다.


10년 전 일어난 개발 비리로 열린 재판에 증권사 직원 A 씨가 증인으로 나왔다. A 씨가 소속된 증권사는 비리를 저지른 개발업자들에게 대출을 내준 곳이다.

검사 "이 문건, 증인이 작성하셨죠?"

A 씨 "제 사인이 있는 걸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검사 "이런 조항이 있던 것 기억나십니까?"

A 씨 "... 기억나지 않습니다."

검사 "본인이 작성하셨다면서요?"

A 씨 "평소에 수도 없이 하는 업무인데, 10년 전 내용을 어떻게 일일이 다 기억합니까?"

마치 10년 전 점심에 반찬으로 김치를 먹었는지 콩나물 무침을 먹었는지 기억해 내라는 격이다.

라쇼몽 포스터 / 위키백과

그런가 하면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라쇼몽」을 떠올리게 하는 증인들도 있다.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산길을 걷던 부부가 강도의 습격을 받았는데, 아내는 성폭행을 당하고 남편은 살해됐다. 그런데 법정에 선 아내와 강도, 목격자의 증언이 저마다 달랐다. 영화는 이를 통해 진실이란 무엇인지, 인간의 기억이 얼마나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왜곡될 수 있는지 메시지를 던진다.


수년 전, 어느 유력 국회의원에게 부정청탁한 B 씨가 증언대에 섰다. 의원은 피고인 석에 앉아 있었다. 의원의 변호인은 자신의 의뢰인이 부정한 돈을 받지 않았음을 항변해야 했다.

변호사 "증인, 의원 사무실에 돈 봉투를 들고 방문하셨었다고요. 그날 차는 어디에 대셨죠?'

B 씨 "사무실에서 좀 떨어진 빵집 옆에 댔습니다."

변호사 "거긴 주차를 할 수 없는 도로인데요?"

B 씨 "분명히 기억합니다. 의원님께 드릴 빵을 사고, 빵집 봉투에 준비해 온 돈을 넣어서 드렸습니다."

변호사 "당일 사무실 방명록에 증인 이름은 없습니다. 선물 내역에도 빵은 없고요. 그날 오지 않은 것 아닌가요?"

B 씨 "아닙니다. 기록이 없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저는 분명히 의원님을 만나 돈을 드렸습니다."

B 씨는 정말로 의원을 만나 돈을 줬을까? 하나 확실한 건, 의원이 돈을 받았다고 인정돼야 정황상 B 씨에게 유리해 보였다. 이런 상황은 이래저래 B 씨에게 영향을 미쳤을 도 모른다.


불확실한 기억


기억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정보를 반복적으로 받아들이면 뇌의 시냅스 연결이 강화하면서 기억이 만들어진다고 알려졌지만, 완벽히 규명됐다곤 볼 수 없다. 생명과학의 발달로 유전자 지도를 완성하고 급기야 생물을 합성하는 단계에 이르렀어도 기억의 메커니즘은 여전히 미스터리다.


기억이 정확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전혀 일어나지 않은 일을 일어났다고 착각하거나, 다른 사람의 경험을 자신의 일로 오해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신경학자 올리버 색스는 그의 마지막 에세이 「의식의 강」(알마)에서 기억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정신이나 뇌 속에 기억의 진실성을 확인하는 메커니즘은 없는 것 같다. 고도의 주관적 방법으로 여과하여 재구성할 수밖에 없다. (중략) 우리가 가진 것이라곤 서사적 진실밖에 없고, 우리가 타인이나 자신에게 들려주는 스토리는 지속적으로 재범주화되고 다듬어진다." (133쪽)

정 증언을 믿을 수 있을까


우리 형법 제152조는 선서한 증인이 허위의 진술을 한 때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하지만 위증을 처벌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증언을 오롯이 믿을 수 있게 될까. 박주영 판사는 저서 「어떤 양형 이유」(모로)에서 이렇게 말한다.


"위증은 사실과 다른 진술을 처벌하는 범죄가 아니다. 기억에 반하는 증언을 처벌하는 것이다. (중략) 그러나 인간은 영악해서 여기에도 대책을 세운다. 오기억(false memory)이다. 스스로 조작하고 신뢰해 강화한 오기억은 거짓말의 어수룩함을 덮는다. 강력하다. 위증죄의 혐의마저 벗어버린다." (176쪽)


상기한 사례에서 B 씨는 과연 거짓말을 하는 걸까, 아니면 자신이 '사실이라고 믿는 기억'을 솔직하게 증언하는 것일까? 이 경우 판사는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궁금증을 명의 법조기자와 판사로 구성된 독서모임에서 화제로 꺼낸 적이 있다. 그러자 어느 부장판사가 이렇게 말했다.


"최근 과학적 연구결과에 따르면 사람의 기억이 얼마나 편집되고 왜곡되는지가 밝혀졌기 때문에, 법정에서도 증언을 전부 믿 않습니다. 다만 CCTV 영상이나 사진, 녹취파일 등 디지털 증거가 없는 상황이라면 증언에 의해 사건을 해결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경우 변호인은 증인의 기억에 다른 빛깔을 부여하면서 피고인에게 유리한 서사를 진술하도록 노력합니다. 그 결과 실제로 작은 뉘앙스 차이에 따라 유무죄가 갈리는 경우도 있는 만큼 증인신문은 재판 과정에서 가장 많이 공을 들이는 과정입니다."


결국 재판에서의 증언이란 인간의 불확실한 기억에 검사와 변호인이 망치와 정을 때려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다듬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판사는 그 결과가 실체적 진실에 가까운지 아닌지 판단한 뒤 판결을 내린다. 결국 증언이란 것도 주관적 서사고, 판사의 판단도 주관에 영향받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판결은 신용할 수 있는 것인가? 순환논리에 빠지고 만다.


언젠가 인간의 뇌파를 정교하게 분석해 기억을 추출해 낼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이 치열한 법정의 풍경도 바뀌게 될까.



거진: 법원위스키


법원 출입기자가 늦은 밤 퇴근 후 집에서 위스키 한 잔 곁들이며 쓰는 취재일기.

제목은 '버번위스키'에서 음을 따온 언어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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