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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영 May 06. 2024

영장제도, 법원과 검찰의 신경전

메거진: 법원위스키


법원 출입기자가 늦은 밤 퇴근 후 집에서 위스키 한 잔 곁들이며 쓰는 취재일기.

제목은 '버번 위스키'에서 음을 따온 언어유희.



역삼역에서 만난 A씨는 동년배 중장년 층과 달리 스타일이 좋았다. 본래 서울에 터를 두고 꽤나 돈을 벌다가 몇 년 전부터 귀농해 스마트팜 사업을 운영하는 A씨. 고된 농사일 때문인지 몸은 군살 하나 없이 호리호리 했다. 촘촘한 체크패턴이 들어간 연갈색 블레이저에 베이지색 면바지, 헌팅캡을 눌러쓴 A씨의 입성에선 부티가 났다. 그는 돈 굴리는 일 때문에 한 달에 두어 번은 서울로 올라오곤 했다.


그런 A씨가 '만나서 밥 한 번만 먹어달라'며 통사정을 했다. 제발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기사로 써달라고 말이다. A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A씨는 중년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일찍부터 코인 투자에 눈떴다. 코인이란 아주 요망한 것이었다. 단기간에 수십 수백 배가 올라 벼락부자를 턱턱 만들어내니 말이다. A씨는 처음엔 이더리움에 투자했다. 하지만 큰돈이 벌고 싶었고, 그러던 와중에 B 코인을 알게 됐다.


B 코인은 당시 상당히 유명했다. 일상생활에서 쓸 수 있고 게임으로 채굴할 수 있으며, 곧 국내외 가상자산 거래소에 상장될 거라고 광고했다. 회사 대표가 방송 인터뷰에도 많이 나왔다. 자연스럽게 투자자들이 몰렸다. A씨도 그중 한 명이었다. A씨는 거금 20억원을 B 코인에 투자했다.


발행사가 폰지사기꾼인지 아니면 실패한 사업가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B 코인은 여타 잡코인처럼 몰락의 길을 걷는다. 투자자들은 B 코인 발행사를 고소했고 대표 등 총책들은 2020년 말 재판에 넘겨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투자자들은 돈을 돌려받고 일당은 죗값을 받을 거라 기대했다.

그런데 기가 차고 코가 막히는 일이 일어났다. 주범 중 한 명인 C씨가 지난해 2월 잠적한 것이다. C씨는 별도 사기전과가 있음에도 불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았다. 법원은 그해 11월에야 구속영장을 발부했고, 경찰이 C씨를 찾아 나섰지만 아직까지 감감무소식이다.


검찰에 전화해서 상황을 물어봤더니 "법원이 영장을 잘 안 내주니 이런 사달이 난 것 아니겠냐"는 반응이다. 사건을 수사한 검사 입장에서야 당연히 피의자들을 구속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야 본인들 면도 서고 성과도 되니까. 검찰은 잘못을 따질 거면 법원에 물어볼 일이라고 했다.


그래서 법원에 전화했다. 수화기 너머 판사의 목소리가 심드렁하다. 그는 "불구속 재판이 원칙"이라고 설명했다. 구속은 개인의 신체의 자유를 박탈하는 만큼 영장은 불가피한 상황에서만 발부해야 하고, 이 경우도 마찬가지였단 것이다. 피고인이 도망간 건 안타까운 일이지만.




둘 중 누구 말이 맞을까?


법원은 갈수록 영장 발부를 제한적으로 하려 한다. 피의자의 인권과 방어권을 최대한 보장하기 위해서다. 대표적으로 현 사법부는 '압수수색 사전심문 제도'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현재는 수사기관이 압색영장을 청구하면 판사는 서류 검토를 통해 발부 여부를 결정한다. 하지만 앞으로는 당사자들을 불러 대면 심리를 한 후 압색영장 발부 여부를 결정하겠단 것이다.


법무부, 검찰, 경찰, 고위공직자수사처 등 수사기관은 극렬 반대했다. 압수수색은 범죄 증거를 찾기 위해 불시에 진행하는 건데, 피의자들을 불러 압색 여부를 미리 따져보겠다는 건, 증거인멸 시간을 주는 꼴이란 것이다. 검찰은 법원이 수사기관을 길들이기 위해 사전심문제도를 도입하는 거라 의심하고 있다.


본래 법원행정처는 김명수 전 대법원장 시절인 지난해 3월 대법원 규칙(형사소송규칙) 일부 개정안을 입법예고하고 ‘6월 1일부터 압수수색 영장 사전 심문제를 도입하겠다’고 했지만 반대 여론에 도입을 미루기로 했다. 후임 조희대 대법원장이 바통을 이어받았지만 지금까지 표류 중이다. 


얼마 전 법원행정처의 모 판사에게 전화를 걸어 현 상황을 물었더니 "현재로선 별달리 어떤 준비하고 액션을 취하고 특별한 건 없습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원점으로 돌아간 걸까요?'라고 묻자 판사는 "그래요 원점이라는 표현이 맞겠네요"라고 답했다. 현재 사법부는 법관 수를 늘리기 위해 국회의원 설득에 총력전을 펼치고 있어서, 영장사전심문제도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정책을 아예 폐기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언제가 또 이슈가 될 것이다. 

법원과 수사기관 주장 중 어느 쪽이 맞다 딱 잘라 말할 수 있는 주제는 아니다. 다만 구속영장이든 압색영장 사전심문제도든 사법정의를 실현할 있는 쪽으로 변화해야 한다.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영장을 마구 남발해선 안 되지만, 그렇다고 지금보다 더 안 내주는 건 현실에 안 맞지 않나 걱정이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사기 범죄도 복잡 다단해졌다. 상기한 A씨 사례처럼 가상자산을 이용한 범죄는 수사가 쉽지 않다. 개념 이해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자금을 추적하기도 어렵다. 증거를 은폐하고 인멸하기가 과거보다 더 수월해졌다고 할까. 이런 상황에서 강제수사에 제한이 생긴다면 유죄 입증은 더 어려워질지 모른다. 그럼에도 수사기관이 수사기법을 갈고닦아야 하는 건 물론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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