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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영 Jun 09. 2024

법원 서관에 몰린 사람들

확증편향으로 분열하는 사회

2024년 5월의 어느 형사재판, 사건의 핵심 증인 A 씨를 상대로 피고인 측 변호사가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반대신문). 그런데 별안간 증인이 피고인의 또 다른 변호사를 상대로 역정을 낸다.


"변호사님, 그렇게 피식피식 비웃지 마세요. 그러면 제가 제대로 답변할 수 있겠어요? 저보고 답변하지 말라는 거예요, 아니면 도발하는 거예요?"


피고인은 한때 유력했던 정치인이고, A 씨는 그의 혐의 입증에 가장 중요한 증인이다. 피고인 변호인은 무조건 A 씨의 증언을 재판장이 신뢰할 수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렇다고 변호인이 증인을 비웃는 건 도를 넘었다. 아무리 피고인에게 심적으로 동조한들, 법조인으로서의 품격을 망각한 행태라 아니할 수 없다.


"B 변호사님, 뭐 하시는 겁니까?!"


기어이 재판장이 불호령을 내렸다. 그제야 B 변호사는 아차 싶었는지 벌떡 일어나 A 씨에게 허리를 굽혀 사과했다. 정말로 A에게 미안해선지, 아니면 재판장에게 밉보이지 않기 위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재판장은 이번에야 말로 단단히 꾸짖겠다 마음먹은 모양이다.


"기본적인 예의를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싸움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잖아요. 욕하고 주먹질하려면 왜 이 법정에 앉아있어요? 야유하고 조소를 날리려면 왜 법정에 나와있어요? 그럴 거면, 저기 '서관 출입구'에만 몰려있는 사람들 많잖아요, 거기 서서 계시면서 핸드폰 들고 계시면 되는 거죠."

2024년 6월 7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대장동 재판에 출석하기 전 서울중앙지법 서관 출입구 전경. 사진 좌우 프레임 바깥쪽엔 이 대표의 지지자들과 태극기부대들이 늘어섰다.


여전히 냉전 시대를 살아가는 서관 출입구 사람들


재판장이 말한 '서관 출입구'는 서울중앙지방법원 건물 서쪽 회전문 근처를 말한다. 도대체 거기에 어떤 사람들이 몰려 있다는 말일까? 바로 더불어민주당과 소나무당 지지자 그리고 스스로를 보수우파라 지칭하는 태극기부대들이렸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중앙지법에서 대장동과 공직선거법 위반, 위증교사 혐의 등 총 세 개의 재판을 동시에 받고 있다. 이 대표는 일주일마다 적게는 한 번, 많게는 세 번 법원에 출석한다. 송영길 소나무당 대표는 2021년 민주당 전당대회 돈봉투 살포 혐의로 역시 이곳에서 재판 중이다.


형사재판은 주로 서관 쪽에서 열리기 때문에 이 대표와 송 대표는 늘 서관 출입구를 드나든다. 이 대표와 송 대표의 지지자들과 반대파들이 한 곳에 몰리는 이유다.


그래서 서관은 늘 소란스럽다. 이들은 저마다 스마트폰을 들고 유튜브로 상황을 생중계한다. 소총을 들고 전장을 누비는 군인 마냥.

서관 출입구 사람들. 흥미로운 점은 이재명 대표의 반대파(사진에서 오른편)도 파란색 티셔츠를 맞춰 입고 온다.

이들의 유튜브 세일즈 포인트는 각양각색이다. 재판 진행상황을 읊어가며 촌철살인 논평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윤석열 탄핵' '김건희 특검' 이재명·송영길 구속' 등 목이 터져라 구호만 외치는 사람 등 다양하다. 법원과 판사를 비난하고, 심지어 애꿎은 방호과 직원에게 시비를 거는 축들도 있다.


최악은 다른 지지자들끼리 싸울 때다. 이 순간만큼은 냉전시대로 돌아간 것 같다. 빨갱이니 친일파니 좌파니 우파니 서로를 야유하고 도발하다가 결국은 누구 입이 더 더러운지 욕설 대결로 이어진다. 분을 못 이겨 상대방에게 달려가기도 한다. 일부겠지만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인에게 불리한 증인을 위협하는 경우도 있다.


매번 난리판굿이 벌어지다 보니 이 대표가 법정에 출석하는 날엔 법원 방호과뿐만 아니라 관할서 경찰 수십 명이 출동해 현장을 통제한다. 서관 출입구에 사람이 몰릴수록 공력이 낭비되고 혈세가 줄줄 새나간다.


이처럼 우리나라의 정치적 분열의 골짜기는 메워지는 법 없이 깊어지기만 한다. 과거엔 사회 공론장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소통하며 자기 객관화가 이뤄질 수 있었다. 하지만 스마트폰과 SNS에만 빠져 살면 이럴 가능성이 차단된다.


내 손 안의 스마트폰은 우리에게 전 세계 누구와도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했지만, 알고리듬과 인공지능(AI)과 같은 첨단기술이 '철의 장막'으로 작동, 우리가 원하는 뉴스만 보여준다. SNS는 좋아하는 정치인들의 소식과 주장으로만 점철된다.


글을 써놓고 보니 유튜버들에게 이보다 더 좋은 공간이 있겠나 싶다.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인을 지근거리에서 찍을 수 있고, 거기에 다양한 소동이 벌어져 극적 긴장감을 높일 수 있으니 말이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그릇된 신념이 교정될 기회는 줄어들고, '싸움의 기본적인 예의'를 잊은 정치 팬덤더욱더 법원 서관에 몰릴까 걱정이다.




거진: 법원위스키


법원 출입기자가 늦은 밤 퇴근 후 집에서 위스키 한 잔 곁들이며 쓰는 취재일기.

제목은 '버번위스키'에서 음을 따온 언어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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