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전, 절치부심 준비했던 변리사 2차 시험(주관식 논술형)에서 평균 0.3점 차이로 고배를 마셨다. 패인은 유기화학 과목에 있었다. 한 문제에 제시된 화합물을 다른 것으로 착각해서 푼 것이다. 0.3은 아주 작은 숫자였지만, 초래한 결과는 지구에서 우주만큼이나 멀었다. 이 나비효과로 나는 현재 법조인이 아닌 언론인의 길을 걷고 있다.
재산분할 약 1조4000억원, 위자료 20억원을 인용해 '세기의 이혼'으로 불리는 최태원 SK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이혼소송 항소심 판결에서도 어처구니없는 실수가 발견됐다. 1998년도의 대한텔레콤(SK C&C의 전신) 1주당 가격이 1000원인데, 재판부는 100원이라고 계산한 것이다. 어려운 수학도 아니었다. 5만원을 20으로 나누고 그걸 또 2.5로 나누면 되는 단순 산수다. 재판부는 어떤 이유에선지 '0' 하나를 빼먹었다.
최 회장도 적잖이 분했는지, 6월 17일 기자회견에 예고도 없이 찾아와 2심 판결에 대해 직접 불만을 털어놨다. (개인적으론 의도된 연출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1998년의 대한텔레콤 주식 가격이 100원인지 1000원인지가 이 판결에서 중요한 이유는 대관절 무엇일까?
최 회장과 노 관장의 재산분할 이슈 중 가장 첨예하게 부딪힌 항목은 최 회장 보유 SK 주식이었다. SK 주식이 최 회장 개인의 특유재산이 아닌 부부의 공동재산이라고 보면 노 관장과 나눠야 하고, 이 경우 최 회장의 SK 그룹 지분율은 낮아질 수밖에 없다. 1심 법원은 SK 주식을 공동재산으로 인정하지 않고 재산분할로 665억원, 위자료로 1억원만 인용했다.
이 문제는 2심에서도 당연히 쟁점이 됐다. 최 회장 측 변호인단은 SK 주식이 최 회장의 특유재산임을 설득하기 위해 승계상속형/자수성가형 개념을 제시, 최 회장은 이 가운데 승계상속형 사업가라 주장했다. 최 회장이 보유한 SK 주식의 가치는 단순히 고(故) 최종현 회장에게서 물려받은 것일뿐으로, 결혼 이후 노 관장의 내조 영향은 미미하다는 것이다.
반면 최 회장이 아버지 덕을 본 금수저가 아닌 자수성가형 사업가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결혼 기간 아내의 내조 덕에 회사의 가치도 끌어올린 게 되므로, 노 관장은 이혼 시 자기 몫으로 SK 주식을 요구할 수 있게 된다.
재판부는 승계상속형/자수성가형 판단을 위해 틀을 만들었다. 최 회장이 주식을 최초로 매입한 1994년부터 선대회장이 사망해 최 회장이 그룹을 승계한 1998년까지의 주식 가격 상승폭과, 1998년 이후 2009년 SK C&C가 상장 때까지의 주식 가격 상승폭을 놓고 비교했다.
쉽게 말하면 1994년부터 1998년까지의 주식 상승은 선대회장의 역량에 의한 것이고, 1998년부터 2009년까지는 최 회장의 역량에 따른 것이다. 둘 중 무엇이 큰지 비교하면 최 회장이 이미 성장한 회사를 물려받은 것인지 아니면 미약한 회사를 키운 것인지 판단할 수 있다는 논리다.
위 시각자료에서 빨간 막대(선대회장)와 파란 막대(최 회장)의 길이를 비교해보자.
우선 윗부분 막대그래프는 재판부가 최초로 판단한 부분이다. 1994년의 주가는 8원이고 1998년 주가는 100원으로 돼있다. 100에서 8을 나누면 12.5가 나온다. 즉 1994년부터 4년간 선대회장은 회사를 12.5배만큼 성장시켰다. 한편 1998년 100원이었던 주가는 2009년 3만5650원으로 355배가 됐다. 이에 따르면 최 회장은 11년간 회사를 355배 키웠다. 결국 최 회장은 자수성가형이고, 노 관장의 내조는 인정받을 만한 것이 된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1998년의 주가는 100원이 아닌 1000원이다. 1000원을 8로 나누면 125가 되고, 3만5650원을 1000원으로 나누면 35.6가 된다. 선대회장의 기여(125배)가 최 회장(35.6배)보다 커진다. 이에 따르면 최 회장은 승계상속형 사업가다.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면 여기서 의문이 생길 것이다. '최 회장은 2024년 현재도 그룹을 경영하고 있는데, 왜 1998년부터 2009년까지로만 최 회장의 기여도를 판단하지?' 그렇다. 재판부가 진짜 실수한 부분은 이 지점이다.
그렇다면 최근 SK 주가인 주당 16만원을 기준으로 다시 계산해 보자. 1000원이 16만원이 된 것이므로 최 회장의 기여도는 160배가 된다. 선대회장의 기여도 125배보다 크다. 이에 따르면 최 회장은 자수성가형 사업가가 맞는다.
이를 이유로 서울고등법원은 "계산 실수는 있었지만 그럼에도 판결의 결론은 달라지지 않는다"라며 이례적으로 설명자료를 내기도 했다. 실제로도 2심 판결문 전체로는 2024년의 주식 가격을 기준으로 최 회장의 회사 성장 기여도를 판단한다. 애초에 저 대목에서도 2009년이 아닌 2024년을 기준 삼았다면 불거지지 않았을 논란이다.
하지만 이 '사소한 계산 실수'는 이미 나비의 날갯짓이 됐다. 우선 법원의 신뢰도가 적잖이 추락했다. 판사는 누군가를 감옥에 평생을 갇히게 할 수도 있고, 억만금을 물어내게 할 수도 있다. 그런데 1000에서 0 하나를 뺀 이번 실수로 인해, 국민이 판결 결과를 불신하게 될지도 모른다. '징역 3년형이라는데, 혹시 30년에서 0 하나 뺀 거 아냐?'라든가 '손해배상액이 1억원이라는데, 혹시 1000만원에 0 하나 더 붙인 거 아냐?' 등.
대법원에서 판결이 달라질지도 모를 일이다. 어찌보면 1조4000억원까지 인용할 사건이 아녔을 수도 있다. 이 세기의 판결로 SK 그룹은 큰 타격을 입었다. 최 회장의 개인사는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그에 걸맞게 책임을 져야지 그보다 가혹해선 안 될 것이다. 1000원을 100원으로 적은 실수는 최 회장과 노 관장 개인뿐만 아니라 한 기업의 미래, 어쩌면 법원의 운명까지 바꿀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