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준영 Jun 23. 2024

세기의 이혼, 세기의 실수

수년 전, 절치부심 준비했던 변리사 2차 시험(주관식 논술형)에서 평균 0.3점 차이로 고배를 마셨다. 패인은 유기화학 과목에 있었다. 한 문제에 제시된 화합물을 다른 것으로 착각해서 푼 것이다. 0.3은 아주 작은 숫자였지만, 초래한 결과는 지구에서 우주만큼이나 멀었다. 이 나비효과로 나는 현재 법조인이 아닌 언론인의 길을 걷고 있다.


재산분할 약 1조4000억원, 위자료 20억원을 인용해 '세기의 이혼'으로 불리는 최태원 SK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이혼소송 항소심 판결에서도 어처구니없는 실수가 발견됐다. 1998년도의 대한텔레콤(SK C&C의 전신) 1주당 가격이 1000원인데, 재판부는 100원이라고 계산한 것이다. 어려운 수학도 아니었다. 5만원을 20으로 나누고 그걸 또 2.5로 나누면 되는 단순 산수다. 재판부는 어떤 이유에선지 '0' 하나를 빼먹었다. 

6월 17일 기자회견에 '깜짝' 방문해 발언하고 돌아가는 최태원 SK 그룹 회장 / 직접 촬영

최 회장도 적잖이 분했는지, 6월 17일 기자회견에 예고도 없이 찾아와 2심 판결에 대해 직접 불만을 털어놨다. (개인적으론 의도된 연출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1998년의 대한텔레콤 주식 가격이 100원인지 1000원인지가 이 판결에서 중요한 이유는 대관절 무엇일까?


최 회장과 노 관장의 재산분할 이슈 중 가장 첨예하게 부딪힌 항목은 최 회장 보유 SK 주식이었다. SK 주식이 최 회장 개인의 특유재산이 아닌 부부의 공동재산이라고 보면 노 관장과 나눠야 하고, 이 경우 최 회장의 SK 그룹 지분율은 낮아질 수밖에 없다. 1심 법원은 SK 주식을 공동재산으로 인정하지 않고 재산분할로 665억원, 위자료로 1억원만 인용했다.


이 문제는 2심에서도 당연히 쟁점이 됐다. 최 회장 측 변호인단은 SK 주식이 최 회장의 특유재산임을 설득하기 위해 승계상속형/자수성가형 개념을 제시, 최 회장은 이 가운데 승계상속형 사업가라 주장했다. 최 회장이 보유한 SK 주식의 가치는 단순히 고(故) 최종현 회장에게서 물려받은 것일뿐으로, 결혼 이후 노 관장의 내조 영향은 미미하다는 것이다. 


반면 회장이 아버지 덕을 본 금수저가 아닌 자수성가형 사업가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결혼 기간 아내의 내조 덕에 회사의 가치도 끌어올린 되므로, 관장은 이혼 자기 몫으로 SK 주식을 요구할 있게 된다.


재판부는 승계상속형/자수성가형 판단을 위해 틀을 만들었다. 최 회장이 주식을 최초로 매입한 1994년부터 선대회장이 사망해 최 회장이 그룹을 승계한 1998년까지의 주식 가격 상승폭과, 1998년 이후 2009년 SK C&C가 상장 때까지의 주식 가격 상승폭을 놓고 비교했다. 


쉽게 말하면 1994년부터 1998년까지의 주식 상승은 선대회장의 역량에 의한 것이고, 1998년부터 2009년까지는 최 회장의 역량에 따른 것이다. 둘 중 무엇이 큰지 비교하면 최 회장이 이미 성장한 회사를 물려받은 것인지 아니면 미약한 회사를 키운 것인지 판단할 수 있다는 논리다. 

SK 그룹이 배포한 보도자료 중

위 시각자료에서 빨간 막대(선대회장)파란 막대(최 회장)의 길이를 비교해보자. 


우선 윗부분 막대그래프는 재판부가 최초로 판단한 부분이다. 1994년의 주가는 8원이고 1998년 주가는 100원으로 돼있다. 100에서 8을 나누면 12.5가 나온다. 즉 1994년부터 4년간 선대회장은 회사를 12.5배만큼 성장시켰다. 한편 1998년 100원이었던 주가는 2009년 3만5650원으로 355배가 됐다. 이에 따르면 최 회장은 11년간 회사를 355배 키웠다. 결국 최 회장은 자수성가형이고, 노 관장의 내조는 인정받을 만한 것이 된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1998년의 주가는 100원이 아닌 1000원이다. 1000원을 8로 나누면 125가 되고, 3만5650원을 1000원으로 나누면 35.6가 된다. 선대회장의 기여(125배)최 회장(35.6배)보다 커진다. 이에 따르면 최 회장은 승계상속형 사업가다.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면 여기서 의문이 생길 것이다. '최 회장은 2024년 현재도 그룹을 경영하고 있는데, 왜 1998년부터 2009년까지로만 최 회장의 기여도를 판단하지?' 그렇다. 재판부가 진짜 실수한 부분은 이 지점이다. 


그렇다면 최근 SK 주가인 주당 16만원을 기준으로 다시 계산해 보자. 1000원이 16만원이 된 것이므로 최 회장의 기여도는 160배가 된다. 선대회장의 기여도 125배보다 크다. 이에 따르면 최 회장은 자수성가형 사업가가 맞는다. 


이를 이유로 서울고등법원은 "계산 실수는 있었지만 그럼에도 판결의 결론은 달라지지 않는다"라며 이례적으로 설명자료를 내기도 했다. 실제로도 2심 판결문 전체로는 2024년의 주식 가격을 기준으로 최 회장의 회사 성장 기여도를 판단한다. 애초에 저 대목에서도 2009년이 아닌 2024년을 기준 삼았다면 불거지지 않았을 논란이다.


하지만 이 '사소한 계산 실수'는 이미 나비의 날갯짓이 됐다. 우선 법원의 신뢰도가 적잖이 추락했다. 판사는 누군가를 감옥에 평생을 갇히게 할 수도 있고, 억만금을 물어내게 할 수도 있다. 그런데 1000에서 0 하나를 뺀 이번 실수로 인해, 국민이 판결 결과를 불신하게 될지도 모른다. '징역 3년형이라는데, 혹시 30년에서 0 하나 뺀 거 아냐?'라든가 '손해배상액이 1억원이라는데, 혹시 1000만원에 0 하나 더 붙인 거 아냐?' 등.


대법원에서 판결이 달라질지도 모를 일이다. 어찌보면 1조4000억원까지 인용할 사건이 아녔을 수도 있다. 이 세기의 판결로 SK 그룹은 큰 타격을 입었다. 최 회장의 개인사는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그에 걸맞게 책임을 져야지 그보다 가혹해선 안 될 것이다. 1000원을 100원으로 적은 실수는 최 회장과 노 관장 개인뿐만 아니라 한 기업의 미래, 어쩌면 법원의 운명까지 바꿀지 모르겠다.




거진: 법원위스키


법원 출입기자가 늦은 밤 퇴근 후 집에서 위스키 한 잔 곁들이며 쓰는 취재일기.

제목은 '버번위스키'에서 음을 따온 언어유희.



이전 03화 '세기의 이혼' 재판 현장에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