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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영 Jun 06. 2024

'세기의 이혼' 재판 현장에서

최태원-노소영 이혼소송 2심 선고 방청기

수조 원 대의 재산분할 규모로 '세기의 이혼'으로 불린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과의 이혼소송. 어쩌다 보니 선고 재판 법정에 직접 들어갈 기회가 생겼다. 판결의 내용이야 이미 분석기사가 차고 넘쳐나니, 이날 재판을 방청하며 받았던 느낌만 글로 풀어보고자 한다.


역사적인 재판을 두 눈으로 볼 수 있어 좋은 기회라 생각했지만, 몇 가지 이례적인 점은 있었다. 민·형사 재판이 대부분 공개되는 것과 달리 이혼소송과 같은 가사재판은 비공개가 원칙이다. 민감하고 내밀한 가정사가 드러나 2차 피해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이혼소송 항소심 변론기일도 전부 공개되지 않았다. 기자들은 법정 밖에서 변호사나 회사를 부단히 취재했으나, 양측의 입은 무거웠다.


그런데 서울고등법원은 선고재판만큼은 공개했다. 선고가 이뤄지는 본법정뿐만 아니라 별도의 중계법정도 운영했다. 아마 관심사가 큰 이슈인 만큼 국민의 알권리를 앞세워야 한다는 판단이었을 것이다. 판결 선고기일은 5월 30일 오후 2시. 20분쯤 미리 법정 앞 복도 의자에 앉아 있었다. 법정 경위들이 허가받은 사람만 들여보내기 위해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사실 모든 재판 방청 절차가 이렇게 까다로운 것은 아니다. 일반적인 민사, 형사재판은 사건 관계인이나 법조인이 아닌 일반인도 재판 방청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평일엔 거의 늘 이러저러한 재판이 열린다. 법원에 도착해 소지품 검사를 하고 법정으로 올라가 보자. 대학교 강의실처럼 여러 법정이 죽 늘어서 있고, 각 입구엔 진행 중인 재판 정보가 떠 있다. 문을 조용히 열고 들어가 법정 경위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빈 의자에 앉으면 된다. 휴대전화를 꺼내 영상을 촬영하거나 녹음하지만 않는다면 누구도 뭐라 하지 않는다.


시간이 임박해 법정 안으로 들어갔다. 방청석 개수는 14개 정도였고, 이 가운데 기자가 4명이니 10석이 최태원-노소영 양측 인사들 몫이었을 것이다. 최태원 회장과 노소영 관장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형사재판의 피고인이 아닌 이상 재판에 출석해야 할 의무는 없다. 노 관장 쪽 변호사들이 가볍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SK 측은 있었는지 없었는지 알기 어려웠다.


"모두 일어서 주십시오."


법정 경위가 엄숙한 목소리로 외쳤다. 오후 1시 58분쯤 판사들이 입정 했다. 법대(法帶)에 선 판사들과 소송의 당사자 및 변호인, 방청객이 목례로 인사하는 것은 오랜 법정의 예절이다.


"출석한 원고 측 대리인?"


재판장인 김시철 부장판사가 원고(최태원 회장)와 피고(노소영 관장) 측을 호명한다. 역시나 최 회장과 노 관장은 둘 다 나오지 않았다. 최 회장 측 변호사들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원고석은 텅 비었다. 결과를 예측하고 오지 않은 것일까? 알 수 없다. 노 관장 측 변호사들만 피고석에 나가 앉는다.


"판결문이 조금 길어서, 설명을 먼저 하고 주문(판결의 결론)을 읽겠습니다."


김 부장판사는 사뭇 무덤덤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우선 이번 사건에서 얼마나 고려할 점이 많았는지를 강조한다. 재판부에 따르면 1심 법원에 제출된 자료는 약 7900쪽. 그런데 2심에선 3만 5000쪽으로 4배 이상 불다. 아마 1심 결과에 불만을 품은 양 측이 새로운 공격방어방법을 제출했기 때문일 것이다. 1년 3개월 동안 과연 인간이 검토할 수 있는 양일까.


아무튼 오늘 할 말이 많은 모양인지 김 부장판사의 말은 빨랐다.


"2심 결과 반소(노소영 측 이혼청구) 인용한 1심 결론은 유지한다. 다만 위자료는 지나치게 낮아서 증액하고, 재산분할은 1심이 좁아서 확대해야 한다는 입장…"


이 대목에 법정 내 모두의 청각 신경이 쏠렸다. 1심 법원은 최태원 회장 이혼 원인을 제공한 유책배우자 보고, 노소영 관장에게 위자료 1억 원과 재산분할로 665억 원을 지급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그런데 대체 2심은 어떤 결론을 내렸기에 '지나치게 낮아서 확대해야 한다'라고 말한 것일까?


아마 이때쯤이었던 것 같다. 내 앞자리에서 노트북으로 재판 내용을 받아치던 사람이 한숨을 내쉬기 시작한 시점이. 기자가 아닌 건 확실했고, 원고나 피고 측 회사 혹은 로펌 직원이었을 것이다. 한숨의 이유도 알 수 없다. 짙은 패색에 따른 절망감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판사의 말을 치기가 버거워서였는지.


후자라면 나도 공감하는 바다. 이날 김 부장판사는 50분 넘게 판결 요지를 설명했는데, 말이 빠른 데다 가끔씩 내용을 흐리고 건너뛰는 부분도 있어서 속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녔다.


뇌와 손목이 뻐근했다. 속기는 단순히 손가락만 빠르다고 해서 능사가 아니다. 상대방이 말하는 내용을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어야 손가락이 거침없이 나아갈 수 있다. 운전에 비유하자면 익숙한 길과 초행길을 갈 때의 차이랄까?


하지만 그런 가운데도 분명하게 들리는 말들이 있었다. 김 부장판사는 2013년 최 회장이 별도 사건으로 수감 중이 당시 노 관장에게 보낸 편지 내용과, 2018년 또 다른 재판의 증인으로 나와 증언한 내용이 서로 모순다며 "최 회장의 주장을 신뢰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라고 지적했다.


다른 여성과 오랜 기간 관계를 유지한 데 대해서도 "혼인의 순결과 일부일처제를 전혀 존중하지 않는 모습"이라고 비판했고, 이로 인해 노 관장은 엄청난 정신적 피해를 입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앞자리에서 예의 그 한숨소리가 이어졌다.


방대한 설명을 마치고, 드디어 판결 주문을 읽을 때였다. 느슨해진 정신을 다잡고 귀와 손가락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원고는 피고에게 위자료 20억 원, 재산분할로 1조 3808억 원을 지급하라"


이 말을 끝으로 재판은 끝났다. 법정을 나선 뒤 동료 기자와 얼빠진 표정으로 서로가 들은 숫자를 맞춰보았다. 위자료와 재산분할액 모두 1심 인용액의 20배 이상이었다. 엄청난 결과였다. 후폭풍을 직감했다.


노소영 측 변호사들이 법원 밖에서 취재진을 만나 판결 소감을 브리핑했다. 대표로 인터뷰한 변호사는 기쁜 속내를 못 감추겠는 표정이었다. 1조 3808억 원 재산분할에 대한 변호사 성공보수는 과연 얼마일까? 노소영과 함께 변호사들도 큰 부를 쥐게 될 터였다. 물론 아직 대법원 판결이 남아있긴 하지만.


반면 SK의 하늘은 두쪽났을 것이다. 이날 늦은 오후 최 회장 변호인단은 "재판의 결론이 지나치게 편파적"이라며 "아무 증거도 없이 편견과 예단에 기반해 기업의 역사와 미래를 흔드는 판결"이라는 입장을 내놨다. 그 심정 말해 무엇하랴.




거진: 법원위스키


법원 출입기자가 늦은 밤 퇴근 후 집에서 위스키 한 잔 곁들이며 쓰는 취재일기.

제목은 '버번 위스키'에서 음을 따온 언어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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