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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영 Oct 01. 2024

사랑이 지나가면

이재명 대표 공직선거법 공판 스케치

지독했던 여름 끝 청명한 하늘이 반갑다. 산뜻하고 선선한 바람이 흉부를 훑고 스쳐간다. 이유 없이 피어오른 애상감에 가슴이 헛헛하다. 사계절 가운데 가을에만 느낄 수 있는 정취다.


길을 걷다 이문세의 <사랑이 지나가면>을 듣는다.


오카리나 선율을 듣노라면 내가 발 디 각박한 도심이 시골 코스모스 길로 바뀐다. 무덤덤하면서도 감정을 꾹꾹 눌러 담은 이문세의 목소리가 맑은 가을 하늘로 애처롭게 퍼진다.

출처: 이문세 공식 홈페이지(www.leemoonsae.com)

아쉽게도 이 명곡을 알게 된 건 최근다. 9월 20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공직선거법 위반 결심공판에서 말이다.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은 이재명 대표가 지난 대선 과정에서 지상파 등 방송에 나가 "A 씨를 모른다"라고 했던 말이 당선을 위한 거짓말인지 아닌지를 따지는 재판이다.


너무 더운 날이었다. 9월 중순인 데다 추석이 지났음에도 열대야는 끝나지 않았고, 법정엔 에어컨도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하필 법정도 가장 좁은 곳이었다. 좁디좁은 방청석을 국회의원들과 변호인, 기자, 지지자들이 어깨를 접어가며 다닥다닥 채우고 있었다. 기자들은 노트북을 무릎 위에 펴놓고 검사와 변호인의 설전을 빠짐없이 받아치느라 바빴는데, 노트북이 뿜어내는 열기가 사람을 미치게 했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났을까, 결심공판 중 가장 핵심인 검찰 구형 순서였다. 그런데 검찰이 뜬금없이 노랫말을 인용하기 시작한다.

그 사람 나를 보아도, 나는 그 사람을 몰라요.
그대 나를 알아도, 나는 기억을 못 합니다.

<사랑이 지나가면>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화자에게 깊은 상처가 되는 사람을, 그래서 모르기로 한 현재 심경을 표현한 노래입니다. 이 노랫말이 피고인의 입장과 같아 보입니다.


요약하자면 A 씨는 이재명 대표와 특별한 경험을 나눈 사이지만, 선거에 불리하기 때문에 이재명 대표가 A 씨를 일부러 '모르기로 했다'는 것이 검찰 주장이다.


안 그래도 무더위와 긴 재판에 지쳐있는데, 짜증이 확 났다. 우리는 법정에서 날카롭고 탄탄한 논리로 공방을 주고받길 기대한다. 이런 식의 감성을 자극하려는 파토스(pathos)는 토론회에서나 어울리는 기법이다. 생각해 보라. 검찰이 당신을 기소했는데, 법정에서 노래가사를 인용하면서 유죄라고 주장하는 상황을.


그런데 알고 보니 비유는 이재명 대표 쪽이 먼저 시작했나 보다.  


검찰에 따르면 이재명 대표 측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기 위해 재판부에 의견서를 냈는데, 가수 아이유를 예시로 든 것으로 알려졌다. 내용은 이러하단다.

'너 아이유 알아?'라는 질문에 상대방이 “아니 몰라”라고 답한 경우, 이는 '현재 인식 상태'에 관한 것일 뿐 '경험적 사실'이 아니다.


즉 이재명 대표가 "A 씨를 모른다"라고 한 것은, 현재 기억나지 않는 상황에 대해 사실대로 말한 것이므로 거짓말이 아니란 논리로 보인다. 과거에 이재명 대표가 A 씨와 함께 출장을 가고 골프를 쳤던 '경험적 사실'이 있더라도, '현재 인식 상태'에 따라 모른다고 한 것을 허위사실공표 행위로 보아 처벌해선 안 된다는 주장이다.

아이유 꽃갈피 앨범(출처: NAVER VIBE)

재판이 끝난 후 이문세와 아이유가 인터넷 포털 뉴스면을 도배했다. 양쪽의 논리적 공방은 어땠는지에 대한 평가는 온데간데없었다. 검찰과 이재명 대표 측은 성공한 것일까 실패한 것일까.


그제야 나는 뒤늦게 이문세의 <사랑이 지나가면>을 검색해 들었다. 웬걸, 너무 좋은 노래다. 이번 재판의 최대 피해자는 이재명 대표도 검찰도 아닌 이문세 가수가 아닐까 싶다.


그런데 공교롭게 아이유도  곡을 커버한 적이 있다. 2014년에 발매한 「꽃갈피」 앨범 수록곡이다. 알고 보면 검찰과 이재명 대표 양 측 모두 결심공판을 준비하면서 각자의 <사랑이 지나가면>을 들었던 건 아닐까?



거진: 법원위스키


법원 출입기자가 늦은 밤 퇴근 후 집에서 위스키 한 잔 곁들이며 쓰는 취재일기.

제목은 '버번위스키'에서 음을 따온 언어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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