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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영 May 11. 2024

믿고 싶은 사실과 현실

현재 법원에선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피고인인 대장동·위례신도시 개발특혜의혹 재판이 열리고 있다. 이 사건은 법원 출입기자들에게 있어 최우선순위다. 재판에서 증인들이 어떤 얘기를 하는지, 이 대표가 어떤 반박을 내놓는 지를 물 샐 틈 없이 기록해야 한다.


핵심은 대장동·위례신도시 사업에 참여한 민간업자들이 이 대표에게서 특혜를 받았는지 여부다. 대장동 사업에 문제가 있었단 점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 과정에 이 대표가 직접적으로 연루돼 있는지는 다른 문제다. 검찰은 이를 입증하려 하고, 이 대표 측은 부인한다.


대장동 실무자들인 유동규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개발본부장과 남욱 변호사는 이 대표가 자신들의 '윗선'이라고 주장한다. 당시 성남시장의 의지 없이는 추진할 수 없던 일이란 논리다. 하지만 이 대표는 일축한다. 당시 여건상 민간업자가 참여할 수밖에 없었지만, 본인은 민간업자를 견제했다는 것이다.


검찰은 이 대표의 유죄를 증명하기 위해 여러 근거를 들고 있지만, 강력한 한방 중 하나는 대장동 민간업자 정영학 회계사의 녹취록이다. 2013년 8월 30일에 남 변호사가 정 회계사와 통화하면서 유 전 본부장의 얘기를 전하는 대목을 보자.

남 변호사 - 내부적으로 니가 알아서 하면 돼. 할 문제고 (...) 너 결 결정한 대로 다 해줄 테니까. 그렇게 직원들한테도 너 준 일정대로 그렇게 진행하게끔 그런 구조로 진행할 거라고 다 서류 다 줘놔서 얘기해 놨으니까, 그걸 준비하고 있으니까 너는 절대 차질 없이 해라. 요 정도입니다 형님.

정 회계사 - 아..

남 변호사 - 요건 무조건 가긴

정 회계사 - 잘 알겠습니다.

남 변호사 - 뭐 지금까지는 변수는 없어 보입니다.

정 회계사 - 오케이 오케이. 우리만 준비하면 되겠네요.

여기서 (...)로 표기된 부분이 문제의 구간이다. 검찰은 이 부분이 '위 어르신'으로 들리고, 유 전 본부장이나 민간업자들에게 있어 위 어르신은 당시 이재명 성남시장 등 밖에 없다는 논리다. 이 부분이 '위 어르신'이라 가정하고 읽으면, 정말 이 대표가 윗선으로서 위례신도시 사업을 지시한 것처럼 이해된다.


하지만 이 대표 측은 '위 어르신'이 아니라며 강하게 부인했다. 결국 재판부는 녹취록 속 화자인 남 변호사가 증인으로 출석할 때 녹취파일을 들어보기로 했다. 발언 당사자인 남 변호사는 해당 워딩이 '위 어르신'인지 아닌지 가릴 수 있을 거란 취지다.


5월 7일 재판이 끝나기 직전 녹취파일이 재생됐다. 나도 내 귀로 직접 녹취를 듣기 위해 법정에 들어갔다. 그런데 녹취의 음질이 매우 좋지 않았다. 정 회계사 목소리는 또렷하고 크게 들리는 반면, 남 변호사 목소리엔 심한 잡음이 끼어 있었다. 아마도 통화 상대방인 남 변호사가 품질이 좋지 않은 블루투스 이어폰을 이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남 변호사는 녹취 재생이 끝나기도 전에 대번에 자신 있게 입을 연다.


"위례신도시란 워딩입니다."


말인즉슨 해당 대목이 '위 어르신'이 아닌 '위례신도시'란 것이다. 재판장은 재생속도를 0.5배속으로 하고 다시 들어보자 했다. 나도 온 정신을 집중했다. 이번엔 "위례ㅅ..."까지 들린다. '신도시' 부분은 정확지 않지만 '위례'는 분명했다. 적어도 '위 어르신'일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검사들의 표정이 굳었다. 몇몇은 손으로 턱을 연신 쓰다듬었다. 반면 변호인단은 의기양양한 얼굴이었다. 그중 한 변호사에게 연락해 봤더니 "변호인들은 예전부터 해당 부분이 '위례신도시'라고 주장해 왔다"며 검찰을 한심해 했다.


우리는 쉽게 확증편향에 빠진다. 정신을 쏟아 몰두하는 일일 수록 더 그렇다. 본인의 생각과 논리가 비합리적이라거나 심지어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쉬이 하지 못한다. 하지만 중요한 순간일수록 자기 객관화를 하고, 보다 멀리 떨어져 제삼자의 시선에서 사안을 검토해봐야 한다.


만약 검찰이 남 변호사에게 미리 녹취를 들려주고 의견을 구했더라면 이토록 체면 구기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메거진: 법원위스키


법원 출입기자가 늦은 밤 퇴근 후 집에서 위스키 한 잔 곁들이며 쓰는 취재일기.

제목은 '버번 위스키'에서 음을 따온 언어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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