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현장에서 30화

긴 터널의 끝, 예측 못한 장소

기자가 된 이유

by 정준영
실패를 통해 비로소 긍정하게 된 인생


사실 처음부터 기자가 되고 싶었던 건 아니다.


어린 시절부터 내겐 관운이 있다고 생각했다. 반장을 아예 두지 않았던 국민학교 1학년 때를 빼곤 학창 시절 내내 감투를 썼다. 고등학교 때엔 전교 부회장에도 당선됐다. 동아리 활동에도 열심히였다. 방송반에서 교내 방송 DJ를 했고, 밴드부에선 기타를 치며 무대 스포트라이트를 즐겼다. 시험이 닥치면 또 죽어라 공부했기 때문에 내신 성적도 교내 상위권이었다. 의도했던 건 아니었으나 대입 수시전형에 특화된 학창 시절이었다. 오만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적당한 수능 점수를 받고 남들이 소위 명문대라고 하는 곳에 입학할 수 있었다.


대학에 가서도 여기저기 남들 앞에 나섰다. 과대표를 하고 그 이듬해엔 단과대 학생회장이 됐다. 교내 토론 학회 활동을 하며 대회에 나가 상도 적잖이 받았다. tvN '대학토론배틀3' 프로그램에 참가해 준우승을 하고 MVP에도 선정됐다. 지상파 토론 프로그램 대학생 패널로 활동하며 대통령 선거 후보 토론회에도 초청됐다. 주변에선 내가 대단한 사람이 될 거라 의심하지 않았다. 나는 선망의 시선에 둘러싸여 점점 우쭐해져 갔다.


장래희망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나는 "논객"이라고 답했다. 진중권 교수나 전원책 변호사처럼 방송국 스튜디오에 앉아, 민감한 사회 현안에 대해 각본 없이 공방을 주고받으며 해결책을 논하는 삶을 꿈꿨다. 그러려면 그럴싸한 타이틀이 필요했는데, 법조인만 한 직업이 없었다. 하지만 당시 사법고시는 끝물이었고 로스쿨을 준비하기엔 학점이 처참했다. 우선 이공계 전공을 살려 지식재산권을 다루는 변리사가 된 뒤, 그 자격증을 내세워 로스쿨에 입학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내 논리력이라면 따놓은 당상이란 자신감이 있었다. 그때까지의 삶의 궤적을 돌이켜봤을 때 무리 없이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때가 인생의 꼭짓점이었다. 첫 번째 관문일 뿐인 1차 시험에서만 두 번 연속 낙방했다. 첫 불합격 때는 그나마 괜찮았다. '연습 삼아 본 것'이라며 합리화가 가능했으니까. 그런데 두 번째부턴 쥐구멍에 숨고픈 심정이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내 실패 소식이 알려지는 게 싫어 잠수를 탔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끊고 학교 도서관과 집 그리고 학원만 오갔다. 헐렁한 트레이닝복에 모자를 푹 눌러쓰고 그림자처럼 살았다. 점차 자존감이 약해져 갔다. 막연히 잘될 것만 같았던 인생이, 어쩌면 수렁으로 빠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처음 들기 시작했다. 성격도 예민해져서 사소한 일로 친구들과 사이가 틀어지기도 했다.


3수 끝에 1차 시험을 통과했고, 그 해에 치른 첫 번째 2차 시험에선 떨어졌다(1차 합격자에겐 두 번의 2차 응시 기회가 주어진다). 분 단위로 공부시간을 관리했다. 책상에 앉아있는 시간만 하루에 14시간에 달했다. 그때 내 나이 스물아홉 살, '아홉수'였다. 아직 학교도 졸업하지 못했다. 실패 이후의 삶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정말 치열하게 공부했고, 덕분에 2차 시험은 후회 없이 치렀다. 사실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없진 않았지만, 어쩌겠는가. 운명의 화살은 이미 활시위를 떠났다. 치열한 여름이었다.


합격자 명단은 늦가을에 발표됐다. 스물아홉 살이 한 달여 남지 않은 시점.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시스템 오류가 아닐까 페이지를 여러 번 새로고침 했지만 그 '불'길하고 '불'쾌한 글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달팽이처럼 숨어들었다. 그런데 예전과 달리 눈물은 나지 않았다. 그저 거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가족들과 응원해준 친구들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울 따름이었다. 결국 이게 내 운명이었다. 재도전은 하지 않기로 했다. 삼십 대에도 공부를 하고 싶진 않았다. 5년의 세월이 매몰비용이 될 처지에 놓였지만, 절망의 고리를 끊는 것이 더 중요했다. 결단이 필요했다. 나는 침대에서 분연히 일어나 노트북을 펼쳤다.


사실 플랜 B를 준비하지 않은 것은 아녔다. 2차 시험을 보자마자 언론고시 스터디에 가입했다. 기자도 일종의 논객이니까. 경험 삼아 몇 군데 지원해보기도 했다. 물론 번번이 낙방했지만. 본격적인 준비는 변리사 시험 불합격 발표 후 시작했다. 당시 공채 모집 중인 언론사마다 지원서를 넣었고, 같은 기자 지망생들과 만나 글을 쓰고 토론했다. 잠시나마 불합격의 아픔을 잊을 수 있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몇 군데 회사의 필기시험을 통과했다. 한 경제전문매체에서 나의 변리사 수험생 경력에 대해 관심을 보였고, 이후 몇 번의 전형 끝에 최종 합격했다. '합격'이라는 두 글자를 보기까지 나는 얼마나 먼 길을 돌고 돌아왔는지. 형형색색의 트레이닝복과 운동화 대신 말끔한 정장에 구두를 신고 버스에 오르던 날이 떠오른다. 두꺼운 수험서 대신 노트북을 펼치고, 답안지 대신 기사를 썼다. 인생은 정말 오묘하고 짓궂다.


5년의 수험생활을 통해 나는 겸손함을 배웠다. 그전까지 내 인생이 순탄했던 건 그저 남들보다 조금 운이 좋았을 뿐, 부지불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그땐 그 어떤 능력보다도 실패를 딛고 일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그 후로 나의 내면에 평온이 찾아왔다. 성공하기 위해 조급해하지도, 이미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다른 사람을 질투하지도 않게 됐다. 그리고 나의 인생을 비로소 긍정하게 됐다. 있는 그대로를 자신의 삶으로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와중에 진정한 삶의 목표를 찾게 된다면 열과 성의를 다할 수 있는.


그러자 새로운 길이 열리고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경제매체에서 1년 정도 일한 뒤 다른 종합편성채널 방송사 신입 공채에 합격, 두 번째 수습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첫 직장도 좋은 곳이었지만 다양한 기사를 쓰기 위한 선택이었다. 기자생활은 도전의 연속이었다. 기사를 쓰는 것뿐만 아니라 사건을 발굴하고, 현장에 남겨진 증거와 영상을 찾고, 모르는 사람에게 묻고 따지는 등 실체적 진실을 확인하는 과정 모두가 새로웠다. 세상에 사건은 무궁무진하고 기자의 취재영역은 무한했다. 취재 과정에서 치열하게 고민한 결과를 기사로 작성한다. 정말 매력적인 일이다.


나는 이제 미래를 섣불리 예단하지 않는다. 내가 변리사 시험에 떨어질 줄 몰랐지만, 기자가 될 줄은 더더욱 예측하지 못했다. 그리고 앞으로 5년 동안 또 어떤 인생이 펼쳐질지 알 수 없다. 다른 취재부서에 가서 발바닥에 땀이 나게 뛰어다닐 수도 있고, 어쩌면 다른 직업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 그때까지 매일 메모하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5년 뒤에 다시 열어봐야지. 상상만으로도 즐거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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