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현장에서 18화

그의 과거를 알고 싶다면 법원도서관으로

by 정준영

영화 「리플리(원제 The Talented Mr. Ripley)」의 주인공 톰 리플리는 유명 인테리어 디자이너의 아들 딕을 만나 사랑하게 되고 그의 삶을 선망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딕에 대한 열망이 톰을 집어삼켰다. 딕이 톰을 거부하자 톰은 딕을 죽인 뒤 시신을 은폐하고 자신이 딕인 척 연기하며 살아간다.


영화가 아닌 현실에도 리플리처럼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럴싸한 인생으로 보이지만 알고 보면 직업이나 학력 등등을 거짓으로 만들어내 잰 체하며 사는 사람들. 내 주변에도 있었다. 자신이 유명 소설가의 수제자이며, 필명으로 펴낸 무협지가 이미 공전의 히트를 쳤다고 주장하는 이가. 하지만 모두 자신을 추켜세우기 위해 지어낸 거짓말이었다.


선한 영향력 미치던 비영리단체, 알고 보니 사기집단?


이런 리플리들 중에 실제 사회적인 성공을 거머쥐는 사람도 있다. 일제 강점기와 관련된 역사적 사업을 벌이는 어떤 비영리단체가 있었다. 이 단체의 대표 A는 사명감이 투철한 활동가로 평가받으며 언론에도 자주 등장했다. 나중엔 모 지방자치단체와 사업을 함께 할 정도로 체급이 커졌다.


그런데 어느 날 A는 정치적 사건에 휘말리며 논란의 한 복판에 서게 됐다.


나는 익명의 제보를 받았다. 실제 A는 지방에서 활동하던 건달 출신으로, 전과가 많은 사기꾼이란 것이다. 제보자에 따르면 그간의 비영리단체 활동도 의심쩍은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고, 실제로 과거사 사업과 관련해 분쟁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제보만 듣고 기사를 쓸 순 없었다. 사실 확인이 필요했다.


법원도서관에선 판결문을 검색할 수 있다. 하지만 까다롭다.


A의 과거를 캐내기 위해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법원도서관 판결정보특별열람실에 갔다. 이곳에선 누구나 키워드 검색을 통해 판결문을 열람할 수 있다. 다만 사전 예약을 통해 허가를 받은 사람만 정해진 시간 안에서 이용할 수 있고, 판결문 출력은 커녕 내용 메모조차 불가능하다.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서다. 휴대전화 사용도 금지다. 정해진 메모지와 필기구를 이용해 사건번호만 적어갈 수 있을 뿐이다.


노하우가 필요하다. 이름 검색만으로 특정인의 과거 판결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동명이인 사건까지 모조리 나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름 외에 나이나 출신 지역, 직업 등을 미리 파악해 가서 판결문 내용과 비교해봐야 한다. 게다가 최근 판결문들은 익명화 작업 후 공개되기 때문에 이 과정이 더 녹록지 않다.

법원도서관에서 나눠주는 전용 메모지. 필기도 도서관 펜으로만 해야 한다. / 직접 촬영

그는 진짜 사기꾼이었다


내가 취재하는 사건은 다행히 판결문 검색이 쉬운 편이었다. A의 이름이 특이했기 때문이다. 이름을 검색해서 나온 판결문 가운데 A의 출신지와 소속, 직업을 대조해 확실한 사건번호만 메모했다.


실제 A의 과거는 화려했다. 사기 전력도 있었고, 돈을 빌렸다가 돌려주지 않아 민사소송도 여러 건 당했다. 한 사건으로 2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는데, 출소한 시점과 문제의 비영리단체를 설립한 시기가 들어맞았다. 사기로 먹고살았던 건달이 출소하자마자 과거사 관련 비영리사업을 시작한다? 단체의 진정성에 대해 합리적 의심 제기가 가능한 대목이다. 영화에선 수형자들이 교도소에서 새로운 범죄를 꾸미지 않는가?


당연히 다음 수순으로 그의 과거 업적들을 검증하기 시작했다. 해당 단체를 관리 감독하는 행정안전부를 취재한 결과, 실제 그는 정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검증되지도 않는 사업들을 강행해 왔다. 결국 활동가가 아닌 리플리였던 것이다. 그는 현재 검찰에 의해 구속 기소됐다.


여러분의 주변에도 이런 리플리 한 명쯤 있을지 모른다. 의심된다면 법원도서관에 방문해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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