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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첸 Dec 15. 2018

#09  신기한 남의 집 살림


  이른 새벽부터 베이컨 굽는 냄새와 아이들이 우당탕탕 뛰어다니는 소리에 번쩍 눈이 떠졌다. 잠시 뜬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내가 지금 있는 곳이 어딘지를 되짚어보았다.

  커튼을 양 갈래로 가르자 짙은 창포빛 하늘에 새벽 별이 빛나고 있었다.


  “박수빈, 일어나.”


  때마침 울리는 알람소리에 수빈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늘 녀석이 맞춰놓은 알람을 내가 껐다. 열 두번 손으로 흔들어야 꺼지는 고약한 알람이었다.


  “야, 여기 우리 집 아냐, 브루더호프야. 어서 일어나.”


  브루더호프는 엄마가 꼭 오고 싶어 했던 공동체였다. 1920년대 독일에서부터 시작되어 초대 기독교인들의 단순하고도 소박한 삶을 올곧게 실천하는 영성공동체이다. 우리는 세계 각지에 있는 브루더호프 중에서도 영국 남동부에 위치한 다벨Darvell에 왔다.      








  어느덧 멀리서 종소리가 들려오면, 아이들은 부모님 손을 잡고, 몇몇은 사이좋게 동생과 나무 수레를 타며 공동체 안 자그마한 학교로 등교했다. 아이들이 나가고 난 뒤에는 어른들 모두 맡은 일을 하러 각자의 일터로 향했다.

  엄마는 칼멘을 따라 빨래 팀에서 일하게 되었다. 세탁실 문을 열면 가지런히 개켜있는 빨래들 뒤편의 넓은 창에 아침햇살이 눈부셨다.


  “세상에~ 공동체 사람들의 빨래를 여기서 다 하는 거야?”


  청결을 중요시하는 엄마는 브루더호프에 도착하자마자 세탁기를 찾아 헤매었으나 끝내 찾지 못했었다. 그 많은 사람들의 빨래를 한꺼번에 할 줄이야.

  빨래 개는 할머니들의 이야기 소리에 데굴데굴 드럼통 돌아가는 세탁기 소리는 잔잔하게 묻혔다. 엄마는 이곳에서 오랫동안 생활한 사람처럼 할머니들 옆에 자연스럽게 앉아 빨래를 고르게 펴 접었다.


  “옷들이 아주 오래되었어! 날근날근한 것들이 참 많아. 근데 어쩜 이렇게 반듯하고 정갈하게 나이 들었는지! 구멍 났던 곳은 기워서 또 입고 그러나 봐. 옷들 하나하나에 정성이 묻어있어.”


  쉬는 시간에 만난 엄마는 기분 좋은 얼굴로 내게 말했다.


  “검소하다는 말로는 부족해. 옷이 사랑받았다는 게 느껴지더라니까.”


  엄마는 빨래 하나에 여행하고 싶었던 원을 다 풀은 모양이었다.

  아빠는 제롬을 따라 뭇 아저씨들과 공장에서 나무 장난감을 포장하는 일을 맡았다. 브루더호프는 세계 각지에서 친환경 공법으로 만든 아동용 원목가구와 장난감을 제조하기로 유명하다. 작업환경은 어두운 백열등 전구가 듬성듬성한, 거미줄 쳐진 그런 공장들과는 달랐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곳곳에서 흥얼거리는 노랫소리에 주위는 밝고 차분했다.

  아빠를 제외한 나머지 셋은 오전에 다른 일을 하다 늦은 오후가 되면 공장으로 건너왔다. 멀리서 장난감 부품을 조립하는 엄마와 동생, 박스 가득 실은 수레를 끌고 가는 아빠. 이 사람들이 어쩌다 여기서 이런 일을 하고 있나. 웃음이 났다. 노랗고 허연 머리의 사람들 사이에서 검은 머리 넷을 보니 이전에는 없던 동지애가 피어올랐다.








  하루에 두 번 있는 티타임. 오후 햇살이 데워놓은 따뜻한 의자에 앉아 진한 홍차에 우유 조금, 설탕 두 스푼을 넣고 휘저은 밀크티를 한 모금 홀짝이면 곧 온몸이 나른해졌다. 지금도 일주일에 최소 두 번은 꼭 마셔줘야 하는 나의 밀크티 사랑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이상하게도 수빈이가 보이지 않았다. 다시 일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려도 나타나지 않았다.


“맨날 학교에만 있어서 그런가? 여기 일이 너무 많아….”


  방 침대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던 수빈이는 인기척을 느꼈는지 잠꼬대하듯 말했다. 혹시나 역시나 녀석은 쉬는 시간 틈을 타 방으로 피신한 것이었다. 하긴 365일 책상 앞에서만 앉아있던 고딩이 몸을 움직이려니 힘들 만도 했다.


  “쉬는 건 상관없는데, 쉬려면 제롬한테 말하고 쉬어. 어서 일어나.”


나는 봐주는 법 없이 이불을 걷어 젖혔다.


  “아~쫌!!!! 더 잘래!”


  “다 같이 생활하는 곳에서 최소한 기본적인 것들은 지켜야지. 일어나. 벌써 15분 지났어.”

 

  다 큰 놈이 애처럼 떼를 쓰니 못 봐주겠더라.

  녀석은 한참이 지나서야 공장 안으로 터덜터덜 누렇게 질린 얼굴로 걸어 들어왔다.


  “엄마는 안 힘들어?”


  수빈이의 힘 없는 목소리는 마치 자기편이 되어달라 애원하는듯했다.


  “힘들지는 않아. 근데 같은 부품을 계속 반복해서 조립하니까 좀 졸리고 지루하긴 하네.”


  수십 년 교회 살림만 꾸려왔던 목사에게도 낯선 일임에는 분명했다.


  “근데 있지. 저 할머니들 봐봐. 배울 게 정말 많은 거 같아. 이 일을 평생 해오셨을 텐데, 어쩜 저렇게 즐겁게 일하실 수가 있지?”


  한국말을 알아들을 리 없는 할머니 한 분이 때마침 우릴 향해 빙그레 웃어 보이며 콧노래를 부르셨다. 엄마도 할머니에게 방긋 웃음으로 답했다.

  그 웃음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동생은 고개를 두어 번 가로저었다.









학교를 떠난 19세 고3 동생
교회를 떠난 53세 목사 엄마
밭을 떠난 55세 농부 아빠
집을 떠났던 26세 오춘기 나

어른이 되어도 여전히 어려운 가족(이라는)여행
1년 간의 유럽가족여행기는 매주 토요일마다 찾아옵니다.

사진은 여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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