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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첸 Dec 02. 2018

#07  26살의 이륙


  새벽녘 집을 나섰다.


  ‘놓고 가는 짐은 없겠지? 히드로 공항 입국심사가 까다롭다던데 통과 못하면 어떻게 하지, 그러고 보니 삼각대를 잊었네!’  


  어슴푸레한 하늘 아래로 거대한 구름이 빠른 속도로 흘러갔다. 내 마음속 파도도 지금에 와서 어떻게 할 수 없는 걱정들로 점점 거세게 몰아치기 시작했다.

  비행기가 추락하는 괴상망측한 상상도 해보고, 나 없는 농장 풍경도 차창밖에 그려보다 불현듯 가족들과 공동체와 농장을 다니기로 한 게 걱정이 되기도 했다. 하루에 일정 시간 일하며 숙식제공을 받는 형태가 엄마에게 고되면 어쩌지 돈만 넉넉하다면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농사에 1도 관심 없는 수빈이가 과연 일을 거들며 내리 촌구석에 있는 게 가능할까?

  잠시 한 일주일 바람 쐬러 다녀오는 것도 아니고 온 가족이 사계절을 떠돌아다닌다니.

  저절로 심호흡이 쉬어졌다. 벌써부터 안정되고 익숙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은 회귀본능이 도사렸다. 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아주 중요한 무언가를 빠뜨린 것 같은 기분에 가방 속 여권과 비상금 주머니를 몇 번이고 확인했다. 거사는 시작되었고 이제와서 되돌이킬 수도 없었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불안감은 인천공항에 도착하기까지 나를 옥죄였다.

  쏟아지는 생각들은 마치 해일과도 같아서 런던 행 비행기가 이륙하고 나서야 간신히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아빠는 신혼여행 때 제주도행 비행기를 타본 이래로 생애 첫 해외여행이었다. 장시간 비행이 처음이어서 잠이 안 오는지 아까 읽었던 신문을 다시 집어 들었다. 엄마는 코를 골며 귀여운 자태로 의자에 흘러내리듯 앉아 잠을 자고 있었다. 수빈이는 자기가 여주인공이 된 것 마냥 부끄러운 얼굴로 로맨스 드라마를 정주행 했다.

  내 옆에 앉은 이 사람들을 보니 다시금 일 년치 여행배낭보다 무거운 생각들이 어깨에 내려앉았다. 같이 산 시간만큼이나 떨어져 지낸 시간이 많은 나와 가족들. 그 공백을 어떻게 마주하게 될지 조금은 두려웠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에게 찾아올 변화가 두려웠다.

  환했던 유리창이 칠흑같이 어두워질 때까지 나는 내게 찾아온 마음들을 피하지 않고 깊이 들여다보았다. 공중을 나는 비행기 엔진 소음만큼이나 나의 마음은 소란스러웠다.

  모두가 잠든 밤 나는 자그마한 간이탁자 위에 노트를 꺼내어 혼자 떠오르는 생각들을 암호 같은 필기체로 휘갈겨 적었다. 검열하지 않고 떠오르는 대로 무조건 배출해냈다.

  묵직하게 내려앉은 생각의 침전물들이 더 이상 무겁게 느껴지지 않을 때 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르르 눈물이 끌어 올라왔다. 그리고 가녀린 조명등으로 밝힌 노트 자락 위에 마침표를 찍었다.


   내가 여행을 임하는 자세

   1. 바닥에 엎드려 절하는 자세, 삶이 내게 어떤 시간을 선물하든지 티베트 승려들이 오체투지를 하듯 땅을 바라보며 기꺼이 걸음 하기
   2. 내가 어떤 생각과 마음을 갖든 문제 삼지 않고 그대로 인정하기
   3. 설령 심한 욕설이나 폭력일지라도 억누르지 않고 온전히 허용하고 경험하기

 

  실컷 눈물 콧물을 쏟아내고 나니 눈 앞에 보이던 피사체들이 뿌연 안경을 닦아 투명해진 새 안경으로 보듯 달리 보였다. 가족이라는 사람들도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불안한 마음에 가려 보지 못하거나 혼자 판단하고 오해했던 그들의 모습이 한 겹 두 겹 벗겨져 아무것도 덧붙여지지 않은 순수함 그대로 보여졌다.

  그와 동시에 모든 것은 항상 그 자체로 온전하다는 메시지가 뜨끈뜨끈한 온도로 배와 가슴을 오르락내리락하였다.

 







학교를 떠난 19세 고3 동생
교회를 떠난 53세 목사 엄마
밭을 떠난 55세 농부 아빠
집을 떠났던 26세 오춘기 나

어른이 되어도 여전히 어려운 가족(이라는)여행
1년 간의 유럽가족여행기는 매주 토요일마다 찾아옵니다.

사진은 여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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