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퍼스의 낭만은 내게 저주였다.
어쨌거나 나는 원했던 대학에 들어갔다. 20살 대한민국 청소년이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성취인 명문대생 타이틀을 손에 쥐게 되었다. 친구들은 날 만날 때마다 명문대 생활은 어떠냐고 물었고, 친척 어른들은 우리 부모님을 부러워했다.
하지만 이 시기는 내 인생에서 가장 불행한 시기였다. 정신분석학자 빅터 프랭클은 아우슈비츠에서의 경험을 담은 저서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통해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건 의미라고 했다. 수용소에서의 가혹한 생활을 이겨내고 인간 정신의 본질을 발견해내겠다는 큰 뜻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수용소의 열악한 환경과 독일군의 폭력을 견뎌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정말 그런 것 같다. 동물은 의미를 묻지 않는다. 배불리 먹고 푹 자면 그만이다. 물론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 역시 크게 다르지는 않다. 육식동물이 사냥을 하고 초식동물이 풀을 뜯는다면 사람은 직장에 나가고, 육식동물이 다른 동물로, 초식동물이 풀로 배를 채운다면 사람은 직장에서 번 돈으로 의식주를 해결한다. 어떤 방식으로 먹잇감을 구하고, 생을 이어나가느냐에 차이가 있을 뿐 먹잇감을 구하고 생을 이어나간다는 자체가 다르지는 않다.
하지만 인간의 삶에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 그건 의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하러 가는 걸 싫어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꾸역 꾸역 일어나 일터에 나간다.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힘들게, 하고 싶지도 않은 일을 하며 번 돈을 의미 없는 일에 탕진한다. 술을 마시고, 음식을 사먹고, 해외 여행을 다녀 오고, 비싼 차나 명품을 산다. 돈을 쓸 때는 행복하다. 자기가 뭔가 귀한 사람이 된 것처럼, 진짜 행복을 찾은 것처럼 느낀다. 하지만 다 한 순간이다. 지나고 나면 공허하다. 그러면 사람들은 더 많은 돈을 벌어서 더 비싼 차를 사고, 더 호화로운 관광지에 가야지, 결심한다. 그래서 열심히 돈을 모으고, 또 잠깐 동안 행복해하고, 또 공허해진다. 무한히 반복하다보면 죽는다. 참 바보 같다. 돈을 벌어서 삶이 나아지는 게 아닌데, 진정한 삶의 의미와 행복을 찾을 수 없는데 왜 돈을 벌고, 왜 살아남아야 하는가? 안 벌고 안 살면 되는 것 아닌가? 100만 원을 벌고 100만 원을 쓰나, 안 벌고 안 쓰나 똑같은 거 아닌가?
그래서 인간에게는 의미가 필요하다. 매일의 삶은 돈을 벌고, 생을 이어나가고, 또 돈을 버는 무미건조한 반복일지라도 그 반복을 통해 삶을 어떠한 방향으로 이끌어나가고 싶은지에 대한 지향점이 필요하다. 그게 있다면 이겨내지 못할 게 없다. 많은 아버지들이 직장에서의 고된 노동을 견뎌내고 있는 건 이 반복적 노동을 통해 아내와 아이들에게 더 나은 삶을 선사해주고 싶다는 지향점이 있기 때문이고, 독립 운동가들이 일제의 가혹한 탄압을 견뎌낼 수 있었던 건 대한 독립이라는 지향점이 있었기 때문이며, 수많은 인디 예술가들이 배고픈 무명시절을 견뎌내고 있는 건 언젠가 세상에 자기의 예술 세계를 펼치겠다는 지향점이 있기 때문이다.
20살 이전까지 나에게는 세상에서 디폴트값으로 입력해준 의미가 있었다.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라는 지향점이 있었고, 그게 쌓여서 만들어지는 내신과 수능이라는 지향점이 있었고, 그걸 통해 이룰 수 있는 명문대 진학이라는 지향점이 있었다. 단기, 중기, 장기 목표가 다 짜여 있었다. 나는 그저 따라가면 되었다. 그러니 의미의 공허를 느낄 틈이 없었다. 20살까지 나는 늘 의미로 충만한 삶을 살았다. 그래서 지루한 수험 생활을 견뎌내고 원했던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게 없어졌다. 학교에서 짜준 시간표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수업을 골라서 시간표를 짜야 했고, 학교에서 배정해준 반 친구들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동아리, 내가 선택한 수업에서 만난 친구들과 지내야 했다. 대학만 잘 가면 평생 아무 걱정 없이 편하게 살 수 있다고 했던 어른들이 갑자기 “너는 이제 뭐 할 거니?”라고 묻기 시작했다. 이제 나 스스로 의미를 발견해내야 했다. 어떤 수업을 들을지, 누구와 관계를 맺을지, 그리고 이런 것들을 통해 어떤 인간이 되고 어떤 삶을 살 것인지.
그래서 나는 대학 생활이 즐겁지 않았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 집에서 키우는 애완견은 자유가 없는 대신 스스로 사냥을 해서 먹이를 구해야 할 책임도 없다. 주인이 알아서 챙겨준다. 한편 들개는 누군가의 애완견이 아닌 자기 자신으로서 온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하지만 스스로 먹이를 구해야 할 책임도 있다.
그 무거운 책임을 감당해낼 자신이 있는 이에게 대학시절은 최고의 시기이다. 삶에서 유일하게 의무가 없는 시기이다. 대학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입시 공부를 해야 하고,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는 돈을 벌어야 하지만 대학에 다니는 동안에는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 일주일에 수업은 18시간. 초등학생보다도 적다. 그 공백을 자기가 원하는 것들로 채울 수 있다. 여행을 다녀도 되고, 연애를 해도 되고, 자기가 전문성을 쌓고 싶은 분야가 있다면 밑바닥부터 도전해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책임을 질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해보고 싶었지만 힘들게 과외해서 모은 돈을 해외 여행에 털어넣을 용기가 없었고, 사랑을 하고 싶었지만 용기내어 누군가에게 다가갈 용기가 없었으며, 부모님 통제 없이 자유롭게 살고 싶었지만 부모님으로부터의 경제적 지원은 계속 받고 싶었다.
그렇다고 고등학생 때처럼 주어진 루틴에 따라 빡세게 살지도 못했다. 사회로부터 주입받은 명문대 진학이라는 미션을 성공적으로 완수했지만 내가 원했던 사랑을 얻지는 못했기 때문에 그 다음 단계 미션인 취업에 모든 것을 걸지 못했다. 또 모든 걸 걸었다가 그 미션으로부터 또 배신당할까 두려웠다. 다양한 것들을 경험하고 도전해볼 용기가 없었다면 차라리 스무살 때부터 고시반 들어가서 공무원 시험 준비라도 빡세게 했어야 했는데 그렇게도 못했다.
결국 나는 이도 저도 아닌 대학생활을 보냈다. 대학 이전까지 추구해온 입시와 성공이라는 의미를 대체할 새로운 의미를 발견해내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어른들이 내게 부여해준 그 의미를 계속 밀고 나가지도 못했다. 나는 그 시기로부터 아무런 의미도 발견해내지 못했다. 그래서 불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