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솔로, 그 이후

원점

by 김선비

요즘에도 이런 말을 쓰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대학생 때는 복학생 버프라는 말이 있었다. 군대 갔다 온 첫 학기에는 다들 학점도 잘 나오고 연애도 잘 풀린다는 것이다. 정말 그랬다. 주변에 연애 못하던 친구들도 군대 갔다오면 다들 연애를 했고, 학교 생활도 잘 풀렸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복학 첫 학기에 처음으로 여자 친구가 생겼고 학점도 8학기 중 제일 잘 나왔다.


그런데 막상 지나고 보니 별 거 없었다. 여자 친구는 금방 헤어졌고, 학점도 군대 가기 전과 비슷한 수준으로 돌아왔다. 그런 모습을 보고 친구들은 말했다. 복학 버프가 풀렸다고.


왜 그런 걸까? 군대를 다녀오면 왜 사람이 변하고, 시간이 좀 지나면 왜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까? 그건 군대라는 공간의 특수성 때문인 것 같다. 군대에서는 늦잠을 잘 수 없다. 무조건 아침 6시에 일어나야 한다. 술도 마시지 못한다. 치킨이나 피자 같은 자극적인 음식들을 마음껏 먹을 수도 없다. 게임도 못한다. 여자와 어울려 놀 수도 없다. 야동도 못 본다. 군대는 바깥 세상의 온갖 즐거움들과 격리되어 있는 곳이다. 그러니까 재미없는 것들을 할 수 밖에 없다. 웨이트 트레이닝, 독서, 자격증이나 영어 공부 같은 것들 밖에 할 게 없다.


하지만 사회는 다르다. 재밌는 게 너무 많다. 마음껏 자도 되고 마음껏 술을 마셔도 되고 게임을 해도 되고 여자랑 놀아도 된다.(이건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긴 하다.) 그러니까 공부나 운동 따위를 할 이유가 없다. 복학 버프가 한 학기 이상 유지되지 않는 건 그래서다. 평생 군대에서처럼만 살 수 있다면 대한민국에 성공하지 못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솔로나라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나는 솔로나라에서 인연을 찾진 못했다. 이곳에서 나는 승리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는 이겼다. 내 안의 두려움과 비겁함, 냉소를 극복해냈다. 걸 수 있는 모든 걸 걸어서 내 마음을 표현했다. 비록 상대방이 그 마음을 받아주지는 않았지만 그건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축구에서는 0 대 1로 지는 것보다 0 대 0으로 비기는 게 낫지만 사랑에서는 아니라는 걸 알았다. 거절당하고 상처받는 게 두려워서 아무것도 안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돌려받지 못할 마음이라도 주는 게 더 낫다는 걸 알았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잘 해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성공하건 실패하건 누군가에게 마음을 전하는 일은 멋진 일이라는 걸 알았으니 또 다시 누군가를 만난다면 아낌없이 당당하게 표현해야지 했다. 때로는 거절당하고 상처받는 일도 있겠지만 그 와중에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도 만날 것이고 그러다보면 이 지긋지긋한 악순환의 고리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게 있다. 사회는 솔로나라와 다르다는 것이다. 솔로나라는 일종의 실험실이다. 특정 변수 간의 인과 관계를 밝힐 때는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기타 변수들을 모두 차단해야 한다. 가령 컴퓨터 게임 중독이 청소년의 학업 능력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밝히려면 컴퓨터 게임 외에 청소년의 학업 능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모든 변수를 차단해야 한다. 실험을 하기 전 두 집단의 학업 능력도 동일해야 하고, 수면과 학습 시간, 식사도 동일하게 제공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설령 컴퓨터 게임에 중독된 학생들이 학업 능력이 떨어진다는 결과가 나오더라도, 그게 정말 컴퓨터 게임 때문인지, 아니면 수면 시간이 부족했거나, 수업 방식이 강압적이었기 때문인지 알 수가 없다.


솔로나라도 그렇다. 솔로나라는 사랑 이외에 모든 것들로부터 격리된 공간이다. 이곳에는 우리 가족도 없고, 친구도 없고, 직장 상사도 없고, 거래처 직원들도 없고, 밖에서 만날 수 있는 다른 여자들도 없다. 이곳에는 오직 사랑만이 존재한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그것이었다. 가장 순수한 원형 그대로의 사랑을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사회는 다르다. 솔로나라는 사랑을 하기 위한 공간이지만 사회는 사랑을 하기 위한 곳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 외에 수많은 변수들이 작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순간의 감정에만 집중할 수 없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었다. 솔로나라에서는 이야기를 해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당장 여자 숙소에 가서 노크를 하고 “ㅇㅇ님! 잠깐 얘기 좀 하실래요?” 하면 된다. 그러면 상대는 좋건 싫건 응해야 한다. 협상에 응할지 말지는 상대방 자유지만 적어도 상대방을 협상 테이블에 앉힐 수는 있다. 그런데 사회에서는 다르다. 카톡을 보내야 한다. 부담스럽지 않되 너무 가벼워보이지도 않는, 며느리만 아는 종갓집 김치 레시피 같은 최적의 멘트를 쳐야 한다. 그리고 답장의 간격과 분량, 이모티콘의 유무를 통해 상대방의 의중을 파악해야 한다. 반응이 호의적이라면 이 분위기를 계속 이어 나갈 방법을 찾아야 하고, 부정적이라면 더 노력해서 반전을 시킬지 아니면 접을지를 결정해야 한다. 상대방과 대화를 시작하는 것 자체가 구만리길이다.


그리고 솔로나라에서는 무조건 선택을 해야 한다. 마음에 드는 상대방이 없더라도 일단 아무나하고라도 데이트를 나가야 한다. 그러다보면 기대하지 않았던 상대방으로부터 좋은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회에서는 꼭 선택을 하지 않아도 된다. 딱히 마음에 드는 상대가 없거나, 혹은 있더라도 성공률이 높아보이지 않으면 그냥 아무것도 안해도 된다. 방구석에서 배 긁으면서 넷플릭스 보거나 고양이랑 놀면 된다. 사회에는 사랑 말고도 할 게 너무나 많다.


나 역시 그랬다. 군대에서는 전역만 하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막상 나오고 보면 별 것 없었듯 솔로나라에서도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면 다신 놓치지 않겠다고 결심했지만 막상 변한 게 없었다. 나는 다시 예전의 나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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