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복
다음날 아침에 네가 나를 찾아왔다. 힘든 시간이었지만 내가 곁에 있어주어서 견뎌낼 수 있었다고 했다. 이곳에서 나를 선택하지는 못하겠지만 밖에서 더 오래 시간을 두고 알아가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숙소로 돌아왔는데 벽에 몇 시간 뒤에 최종 선택을 한다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예정된 촬영 기간이 5박 6일이었는데 하루를 단축해서 4박 5일 차에 갑자기 끝내게 된 것이다.
고민했다. 최종 선택을 할 것인가 포기할 것인가. 일단, 선택한다고 해서 내가 커플이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지난밤 데이트권을 포기했을 때 직감했고 오늘 대화를 하면서 다시 한번 확인했다. 너는 내게 마음이 없다. 그걸 뒤집을 방법은 없다. 최종 선택 때 조금 멋지고 근사한 말을 한다고 해서 달라질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미 내게 승리라는 경우의 수는 사라졌다. 남은 건 패배와 무승부다. 그렇다면 무승부라도 하는 게 낫지 않을까?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어서 선택을 하지 않았다고 하면 자존심이라도 지킬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정작 내 마음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있는가? 분명 너에게 끌리긴 한다. 너를 택하고 싶고 너에게 선택받고 싶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너와 나 사이에 그 정도로 많은 교감이 있었는가? 나는 너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가? 나는 정말로 너를 원하는 건가? 어쩌면 최종 커플이 되었을 때 얻을 수 있는 관심, 그리고 좋은 이미지를 원하는 건 아닐까?
늘 그랬듯 답은 안 나왔다. 그래도 이번에는 감정이 시키는 대로 가보기로 했다. 그 감정의 이면에 있는 진심이 무엇인지, 이 선택이 가져올 결과는 무엇일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한 번 믿어보기로 했다. 괜히 자존심 상하고 마음만 다치지 않을지, 연인 관계로 발전하려다 친구로도 남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닌지, 내 마음이 조금이나마 너를 기쁘게 해줄 수 있을지, 오히려 부담만 주는 건 아닌지, 그런 복잡한 생각은 잠시 내려놓기로 했다.
남들보다 조금 생각이 많고 섬세한 편입니다.
그래서 사랑 앞에서 늘 망설였고 뒷걸음질만 쳤습니다.
그런 모습 탓에 몇 번의 사랑에 실패했고,
그 실패들은 저를 더욱 더 소심하게, 솔직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살다보니 서른 셋이 되었습니다.
나름 재미있게는 살고 있습니다.
노래도 부르고, 책도 읽고, 글도 쓰고, 공부도 하고, 주말에는 친구들이랑 공도 찹니다.
그러다보니 어느 정도의 성취도 이루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한켠으로 느껴지는 공허함을 어찌할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그 모든 것들은 수단에 불과할 뿐, 제가 정말 원했던 건 항상 사랑이었으니까요.
그러던 중 [나는솔로]를 보게 되었습니다.
사랑을 하도록, 사랑이 아니면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도록 만들어진 그 공간에서
딱 한 번이라도 사랑이라는 것에 자신을 온전히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원했습니다.
좋아하는 네이버 웹툰 [더 복서]에 이런 대사가 나오더군요.
“인생에 한 번 쯤은 어딘가에서 알 수 없는 힘이 솟아나 삶을 바꿀 수 있게 된다.”
이 방송 출연이 저에게 그런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 방송 출연 신청할 때 보냈던 이메일 내용
그게 내가 이곳에 온 이유였기 때문이다. 나는 참고 기다리고 한 번 더 생각하는 게 익숙한 사람이다. 지금의 나를 만든 건 그것이었다. 그 습관 덕에 나는 좋은 학벌과 좋은 평판, 양호한 재정 상태와 건강한 생활 패턴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 놓치고 있었던 것도 있었다. 그건 나 자신의 감정이었다. 한 번 더 생각하고 고민하는 사이 행동해야 할 때를 놓쳐버렸다. 그래서 후회했고 후회는 아쉬움이, 아쉬움은 미련이 되었다. 그러다보니 여기까지 떠밀려왔다. 갈라파고스. 사회에서 짊어져야 할 책임로부터도, 가족이나 친구들과의 관계로부터도, 사랑이라는 감정 이외의 모든 것들로부터 떨어져 있는 이곳에까지 왔다. 더는 도망칠 곳도 없었다. 그러니까 도망치지 않기로 했다. 최종 선택을 했다.
물론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보기 좋게 차여 버렸다. 밖에서 혹시라도 더 좋은 관계로 발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했지만 그런 동화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현실은 동화가 아니었다. 동화 같았던 4박 5일의 기억은 솔로 나라에 남겨 두고 현실로 돌아오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