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사랑이 찾아오다

구원

by 김선비
바람을 볼 수 없지만 분명히 느낄 수 있어 어디로 향하는지
마음을 볼 수 없지만 누구나 알 수가 있어 무엇을 원하는지
사랑할 때마다 상처가 늘어서 두려움에 벽은 높아만 가고
그 안에 숨어서 그대가 나를 불러도 한참을 그렇게 망설이고 있었지만
My story My story 닫혀버린 마음 열고서 그대만이 날 다시 웃게 해
My story My story 지쳐버린 시간 속에서 그대만이 날 노래하게 해

- BrownEyedSoul, [My story]

웹툰 <내 ID는 강남미인>은 강미래라는 한 여대생의 성장기다. 주인공 미래는 성형미인이다. 학창 시절 외모 때문에 놀림 받았던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살을 빼고 성형 수술을 했다. 하지만 예뻐진 외모로도 어린 시절의 상처는 극복되지 않는다. 그래서 미래는 자기를 소중히 여기지 못한다. 자기를 두고 야한 농담을 하며 낄낄 대는 남자 선배들에게 한 소리 하지도 못하고, 경석이를 좋아하지만 당당하게 마음을 표현하지도 못한다. 자기는 원래 못 생겼으니까, 못 생긴 주제에 성형이라는 편법을 써서 예뻐졌으니까, 성괴니까, 자기를 비웃는 사람들에게 맞설 자격도, 누군가를 사랑할 자격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랬던 미래를 변화시킨 건 서브 남주인 연우영이다. 미래는 처음엔 잘 생기고 인기도 많은 우영이 자기 같은 '성괴'를 좋아한다는 걸 의아하게 여겨 경계하지만 이내 자신도 사랑받고 존중받고 행복해질 자격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미래는 성장한다. 자기를 두고 야한 농담을 한 남자 선배에게 당당하게 사과를 요구하고 좋아하던 경석과도 사귀게 된다. 그리고 자기와 달리 날 때부터 자연미인이었던, 그래서 너무나 부러웠지만 알고 보니 그녀 역시 외모지상주의의 또 다른 피해자였던 서브 여주인공 현수아의 상처마저 감싸줄 수 있게 된다. "사실 미래씨도 알고 있잖아요. 아무도 미래씨를 비웃을 수 없다는 걸."이라는 우영의 진심어린 한 마디에 미래가 각성하는 장면은 내가 꼽은 이 웹툰 최고의 명장면이다.(오죽하면 대사도 외웠을 정도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상상을 해보자. 연우영도 자존감이 낮았다면 어땠을까? 미래 같이 키도 크고 세련되고 도도해보이는 여자는 자기 같은 남자는 거들떠도 안 볼 거라고, 아니, 자기 같이 겁 많고 소심한 남자는 애초에 미래 같은 여자를 좋아할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소개팅녀나 썸녀가 자기에게 무례하게 구는 것 역시 그 여자가 못된 게 아니라 자기가 무시당할 만 해서 생기는 일이라고 생각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우영을 만나기 전 미래처럼 말이다.


우영이 미래에게 그랬듯 미래 역시 우영의 상처를 보듬어주었을까? 우영에게 너는 있는 그대로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존재라고, 누구도 너를 비웃을 수 없다고 말해주었을까? 아니, 절대 안 그랬을 것이다. 우영이 약한 모습, 자기 자신의 가치에 확신을 갖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는 순간 칼 같이 손절했을 것이다. 그러면 우영은 상처를 받을 것이다. 역시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남자라고, 나 같은 놈은 평생 무시당하고 거절당하면서 사는 게 어울린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런 부정적인 감정들은 우영을 더 움츠러들게 만들 것이고, 그러면 연애는 더 어려워질 것이다. 계속 반복될 것이다. 우영은 그 악순환의 굴레를 평생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런 상상을 하는 건 내가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여자인 미래가 예쁘고 날씬해야 했듯 남자인 나는 강하고 호전적이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경쟁하고 남을 다치게 하는 게 싫었고, 그냥 양보하고 져주는 게 편했다. 그래서 사랑받지 못했다. 좋은 사람인 건 알겠지만 남자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을 평생 듣고 살았다. 그래서 노력했다. 공부 열심히 해서 명문대에 들어갔고, 운동도 열심히 했다. 보컬 트레이닝도 2년 정도 받았고, 글쓰기과 독서도 열심히 했다. 부족한 남성성을 다른 가치들로 메꾸려 했다. 미래가 다이어트를 하고 성형수술을 했듯이. 하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온전한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내면의 결핍은 나의 행동과 말투, 분위기에 묻어나왔고, 그 음침한 기운은 여자에게 그대로 전해졌다. 여자들은 그 기운을 귀신같이 알아차렸고, 나를 떠났다. 그 부정적인 경험은 나를 더욱 음침한 인간으로 만들었다.


차라리 못생기고 키가 작고 뚱뚱하고 스펙이 안 좋았다면 좀 나았을지 모르겠다. 결점이 명확하면 무엇을 고쳐야 할지도 명확했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도무지 뭐가 문젠지 알 수가 없었다. 나보다 못생기고 키 작고 뚱뚱하고 학력이나 직업이 안 좋은 사람들도 다 제각기 짝을 만나서 연애를 하는데 나만 늘 혼자였다. 무슨 저주에 걸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기이하게 여자 친구가 안 생겼다. 그래서 지쳐갔다. 일, 자기계발, 인간관계. 무엇하나 소홀히 하지 않는데도 연애가 안 풀리니 지금껏 해온 노력들, 그리고 그 결과물인 나라는 인간이 한없이 무가치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늘 꿈꿔왔다. 부족한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줄 누군가가 나타난다면. 딱 한 번만 나를 이 악순환의 굴레에서 꺼내준다면. 그렇게만 해준다면 그 사람을 위해 내 모든 걸 줄 수 있을 텐데.



그런데 그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여자를 능숙하게 대하지 못하는 내 모습을 귀엽고 순수하다고 해주는, 남자답게 여자를 휘어잡지 못하는 나의 고구마 먹은 화법을 섬세하고 사려 깊고 배려심 있다고 해주는, 그런 사람을 만났다. 구원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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