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물
나는 솔로에서 만났던 어느 커플이 헤어졌다는 소식을 들린다. 인스타에 같이 찍어서 올렸던 사진들이 내려가고, 서로 언팔을 하고, 얼마 뒤에는 게시물이 올라온다. 좋은 오빠 동생 관계로 서로의 길을 응원해주기로 했다고.
이런 소식들을 들을 때마다 지인들이 나에게 묻는다. 저기 나오는 사람들은 서로 마음도 없으면서 방송 이미지 챙기려고 사귀는 거냐고, 방송에서는 서로 죽고 못 살 것 같이 굴더니 어떻게 저렇게 금방 헤어질 수 있냐고 묻는다.
그러면 그때마다 나는 대답한다. 출연자가 시청자들을 속인 게 아니라, 그들도 자기 자신에게 속은 거라고 답한다. 방송이 끝나고 몇 달 뒤, 나는 다니던 제약 회사를 나와서 헤드 헌팅 회사에 들어갔다. 헤드 헌팅이 지금까지 해왔던 영업 경력을 더 발전시킬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영업을 잘하려면 자기가 파는 상품을 잘 알아야 한다. 그래야 고객이 그를 믿고 그로부터 상품을 살 수 있다. 따라서 영업 사원은 자기가 파는 상품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나는 내가 팔던 보톡스와 필러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 대신 사람에 관심이 있었다. 사람이 무엇을 추구하고, 직업을 통해서 그것을 어떻게 구현해내는지에 대해 오랫동안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헤드헌팅을 하면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헤드헌팅은 기업에 적합한 인재를 소개해주는 일, 즉 사람을 파는 영업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해보니 일이 재미가 없고 지루했다. 특히 외근직으로 오랫 동안 일하다 보니 정적이고 답답한 사무실 분위기에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가장 젊고 혈기 넘치는 나이에, 가장 활력 넘치는 9~18시를 칙칙하고 적막한 사무실에서 보내는 게 싫었다. 그렇게 해서 언젠가 팀장이 되고, 이사가 되고, 본부장이 된다고 한들 서울에 집 한 채 사지도 못할 거고, 운이 좋게 사게 된다고 해도 나는 이미 배 나오고 머리 빠지고 주름 자글자글한 아재가 되어있을 거라는 걸 생각하니 더 싫었다. 차라리 시간을 조금 더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외근직으로 옮겨서 남는 시간에 재테크나 사업 구상을 하는 게 더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세상에 어떤 일이던지 처음에는 다 어렵다. 그러니까 반복해야 한다. 몸에 익어서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 나오는 경지가 되어야 한다. 그러면 나의 의식은 더 디테일한 것들을 신경 쓸 수 있다. 디테일을 놓치지 않다 보면 고수가 된다. 헤드헌팅 역시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재미가 없을지 모르지만 반복할수록 실력이 늘고, 그러다 보면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게 되고, 보상도 많이 받게 된다. 그러다 보면 재미도 찾게 된다. 그런데 나는 지금 당장 재미가 없다는 이유로 이 일을 그만두려 하고 있다. 이게 맞는 선택일까? 이런 나약한 마인드로 제약 업계로 다시 돌아간들 잘할 수 있을까?
고민 끝에 결국 나는 다시 제약 업계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 영업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나는 내가 정말로 원했던 게 뭔지를 모른다. 우리의 의식은 너무나 영악하고 간사해서 우리를 너무나 쉽게 속인다. 항상 우리 마음 편할 대로만 생각하려고 든다.
솔로 나라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솔로 나라는 사랑을 하는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사랑이 곧 권력이다. 러브 라인이 없으면 방송에 통편집을 당하고, 시청자들로부터 이럴 거면 뭐하러 나온 거냐는 비아냥을 듣게 된다. 데이트에서 아무도 나를 선택해주지 않으면 남들이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달콤한 사랑의 밀어를 속삭일 때 혼자 숙소에 남아 자장면을 먹어야 한다.
한편 이곳에서 자기의 매력을 보여주는데 성공한 출연자들에게는 일반인으로서 평생에 한 번 누리기도 힘든 명예가 주어진다. 나조차도 그랬다. 나는 커플이 되지도 못했고, 방송 분량이 많지도 않았다. 그런 나조차도 일반인으로서 평생 누려보지 못할 관심을 받았다. 자고 일어나면 인스타 팔로워가 수백 명씩 늘어나 있었고, 별것 아닌 일상 게시물에 댓글과 좋아요가 주렁 주렁 달렸다. 인스타 라이브 방송을 켜면 수십 수백 명이 들어와서 일개 제약회사 영업 사원에 불과한 나 따위의 재미없는 이야기들을 귀담아 들어주었고, 매력적인 이성으로부터 DM을 받기도 했다.
최종 커플이 되거나, 결혼을 한 경우라면 말할 것도 없다. 팔로워 몇 만 명 대의 인플루언서가 되고, 협찬이 들어오고, 거리에서 사람들이 알아보고 사진을 찍자고 한다.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이 인터넷 뉴스 연예면에 올라온다.
이러한 독특한 환경은 사람들을 쉽게 사랑에 빠지게 만든다. 그래서 사람들은 평소 같았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을 카메라 앞에서 하게 된다. 그래서 이 프로그램은 재밌다. 그런데 문제는 왜 그들이 사랑에 빠졌는지, 그들이 진짜 원했던 게 무엇이었는지를 그들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들이 정말 서로를 원했던 건지, 아니면 여기서 커플이 되면 얻을 수 있는 사람들로부터의 관심, 그리고 그로부터 파생되는 비즈니스의 기회들을 원했던 건지를 알 수가 없다.
방송 출연자로서 관심을 받고 있는 도중에는 괜찮다. 인플루언서, 준 연예인으로서 누리는 명예와 관심이 그들의 눈을 멀게 만든다. 행복하긴 행복한데 서로가 곁에 있어서 행복한 건지, 주변의 관심이 그들을 행복하게 만든 건지도 분간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런데 그 뽕이 썰물 같이 빠지고 나면, 그들의 사랑은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 그들의 사랑이 어느 정도였는지, 그들은 정말 서로를 원했던 건지, 아니면 단지 이 멜로 영화의 주인공이 되고 싶었던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