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선
2022년 10월 9일. 나는 솔로 촬영을 마친 지 1년이 되는 날, 4기의 결혼 커플인 정식과 영숙이 결혼을 했다. 오랜만에 출연진들이 한자리에 모였고, 부산에 있던 영식과 순자도 올라와서 두 사람의 새 출발을 축하해주었다. 나는 축가도 불렀다.
지난 1년을 돌이켜보았다. 원점이었다. 오랫동안 준비해온 책을 드디어 출간했지만 몇 권 팔리지 않았고, 연애를 시작했지만 오래 가지 못했으며, 헤드헌팅 회사로 이직을 했지만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아 한 달 만에 다시 나와서 다른 회사에 들어갔다. 많은 것들을 한 것 같았지만 정작 남은 건 없었다.
하지만 원점은 아니었다. 마치 나선형처럼, 한 바퀴를 돌아 제자리로 온 것 같지만 다시 돌아온 자리는 출발했던 자리와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나는 작가가 되었다. 촬영 당시에는 작가 지망생이었지만 이젠 진짜 작가가 되었다. 그 덕에 유명한 유튜브 채널에 몇 번 출연했고, 공중파 토론 프로그램에도 데뷔했다. 칼럼니스트가 되어 작게나마 글밥을 먹을 수 있게 되었고, 브런치 작가로도 선정되었다. 인세를 내 월급만큼 받는다던지, 몇 만 명 대 인플루언서가 된다던지 하는 일이 생기지는 않았지만 나는 어엿한 작가가 되었다. 내 글에 돈을 주고 읽을 가치가 있다는 걸 증명했다. 이제 작가는 되었으니 ‘대’작가가 되면 된다.
연애도 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온전한 사랑이라는 걸 받아봤다. 나도 누군가로부터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나의 과거, 그리고 그 시간 속에 남겨졌던 ‘너’와도 화해할 수 있게 되었다. 너도 이런 마음이었겠구나. 내가 뭐가 부족해서 그랬던 것도, 무언가를 잘못해서 그랬던 것도 아니었구나. 그렇다고 네가 분수를 모르고 고마워할 줄을 모르는 못돼 쳐먹은 여자라서 그랬던 것도 아니구나. 그냥 서로의 마음이 맞지 않았을 뿐이구나.
유명인의 삶이라는 것도 조금은 체험해봤다. 거래처 직원들, 카페나 식당에서 만난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고 사진을 찍어달라 하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물론 조금은 아쉽기도 하다. 요즘에는 시청률도 많이 올랐고, 관련 콘텐츠들도 많이 생겼다. 지금 나간다면 훨씬 많은 관심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정도가 딱 좋다. 내 관심 그릇은 이 정도다. 과도한 욕심은 늘 화를 부른다. 앞으로 더 큰 사람이 되어서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으면 된다. 나는 솔로의 정수가 아니라 인간 김현민, 작가 김현민으로서.
이직을 두 번이나 했다. 헤드헌터 일을 해보려다 잘 안 풀려서 그냥 다시 영업을 하기로 했다. 연봉이 늘지도 않았고, 직무도 그대로다. 새로운 회사에서 새로운 사람과 시스템에 적응해야 하는 부담만 안게 되었다.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그냥 애초에 이직을 하지 않고 익숙한 회사에서 익숙한 사람들과 익숙한 일을 하는 편이 더 나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게 원점인 건 아니다. 지금의 나는 그전의 나와 엄연히 다르다. 다른 일을 해보니 막상 별 것 없다는 걸 알았다. 그러니 다른 일에 대해 환상을 갖지 않을 것이다. 조금 더 현실적으로 접근할 것이다. 찍어먹어 보고 똥인 걸 알았으니 또 찍어먹어보지는 않을 것이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무언가를 이루어내겠지만 막상 삶이 크게 달라지진 않을 것이다. 결혼을 해도, 아이를 낳아도, 팀장을 달아도, 베스트 셀러 작가가 되어도 별 것 없을 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허탈감도 느낄 것이다. 겨우 이런 것들을 위해서 이 고생을 한 건가 싶을 것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삶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을 것이다.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앞으로 나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러다보면 조금은 답에 근접할 수 있을 것이다. 왜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인지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