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으로 굳어지기를
나의 검은 하루에 나는 온갖 빨간색을 입힌다.
그 빨간색은 어디로부터 나왔나.
토해낸 색들이 차곡차곡 쌓이면 나는 드디어 외부세계와의 완전한 단절을 선포한다.
요즘은 어떤 누구와의 수다도 재미있지 않다.
하지 않아도 될 무의미한 말들을 쏟아내는 공간에, 시간에 있고 싶지 않다.
온종일 우울하고, 온종일 철학적이고, 온종일 무거운 이야기들을 다른 사람과 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그런데 나는 온종일 우울하고 온종일 무거운 이야기들만 하고 싶다.
가볍게 떠다니는 말들 위로 나를 올려놓는 순간, 나는 그냥 사라져버리는 것만 같으니까.
또다시 명랑하기만 한 나의 자아가 튀어나와 나를 그런 사람으로, 아무 티도 없는 사람으로, 몹시도 귀하게 또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란 사람으로 규정지을테니까. 가끔씩 나는 왜 내가 사람들만 만나면 그렇게 명랑하고 유쾌해지는지 그 모습이 찌질한 역사를 이어주는 것만 같은 느낌에 빠져든다. 왜 그러냐고 사람들은 의아해서 묻겠지만, 그냥 그런 느낌은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나만의 것이고 언어의 한계라는 것이, 아니 글에도 적당히 나를 감출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정도만 고백할 수 있을 뿐이다.
남편과 밤을 새도 모자랄 정도로 수다를 떨곤 했는데, 요며칠 남편과도 대화가 하고 싶지 않다.
위로받기 위해 하는 말들이 위로가 되어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나서부터 말 대신 글들이 쏟아진다.
외부와 나와의 경계가 지어지는 순간.
그 경계는 분명 나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이제는 내가 지울 수 없는 것들이 되었다.
가끔씩, 나의 지난 찌질했던 순간들이 떠오른다.
왜 그렇게 찌질하게 살 수밖에 없었는지 나는 나의 못난 모습들이 한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쌍하기도 하다. 20대에 누군들 찌질해본 적이 없었겠냐만은 나의 찌질함의 역사들은 누구보다 깊고 또 긴 것만 같으니.
나는 또 누군가를 죽도록 패주고 싶은 마음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그 대상은 나에게 칼질을 해대고 주먹으로 패기 일쑤였던 아빠가 될 때도 있고
그 앞에서 아무 힘 없이 무감각하고 무미건조했던 엄마가 될 때도 있고
아빠에게 주먹으로 맞았다고 이야기하자 맞을 짓을 했겠지라며 웃고 말았던 이모일 때도 있고
반 아이들을 한 명 한 명씩 왕따를 시켜댔던 가시나무같던 아이일 때도 있고
내가 아이를 낳았는데도 제 자식 보약만 챙겨왔던 시부모일 때도 있다.
그런 분노에 휩싸일 때면 나는 어쩔 수 없이 가슴에 빨간약만 바른 채 키보드만 두드린다. 빨간 분노를 토해내고 또 토해내면 언젠가는 그 빨간색은 다른 색으로 변할까, 변하겠지 그 희미한 희망 하나를 품고서.
오늘은 그냥 내 기분만 온전히 드러내는 일기를 쓸 수밖에 없는 그런 날이다.
감추기 위해, 나를 감추기 위해 사람들 앞에서 하는 말들을 한겨울 바람 앞에 던져놓고 얼음으로 얼기를 바라는 그런 날의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