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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술램프 예미 May 17. 2017

안녕, 기억 안녕

슬픔, 안녕

지랄 총량의 법칙이 있다고 한다. 우스갯소리일 테지만, 누군가의 지랄을 보면서 그래도 저 지랄병이 언젠가는 끝나겠지 하는 염원이 담긴 말이라는 생각이 스치며 피식 웃고 말았다.


지랄에도 총량이 있고, 평생 우리가 바깥으로 내야 할 힘에도 총량이 있다면 눈물에도 인생 전체에서 정해진 총량이 있지는 않을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그렇다면 지금 흘리는 눈물도 그 총량을 다하여 언젠가는 말라버릴 날도 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과 함께.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평생에 흘려야 할 눈물과 평생에 겪어야 할 불행들이 똑같은 양과 질로 정해져 있다면 우리는 그토록 힘들게 살지 않아도 될 테니까.




나는 한국 가요를 듣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한국 발라드 듣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가끔, 가사 하나하나를 음미하면서 나를 거기에 대입하고, 어떤 음악을 만났을 때는 갑자기 크고 단단한 물체에 처박히기라도 하듯이  머리가 띵해져 오기도 하고, 그러다 가끔은 그 가사 때문에 지나치게 울 때도 있다. 그래서 아예 가사를 알아들을 수 없는 미국 팝만 듣는다. 


어느 날, 라디오를 듣다가 어떤 가요 하나가 귀에 들어와 집에 와서 또 굳이 그 가요를 찾아봤다. 처음엔 멜로디가 좋아서 찾아봤는데, 역시나 가사 하나에 꽂혀서 나는 또 펑펑 울고야 말았다. 


안녕, 기억 안녕


기억과 이제는 이별했다고 생각했다. 나를 괴롭히는 기억과 이별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는 과정을 거쳤고, 이제는 거의 떼어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찾아든 기억에 아직도 흘려야 할 눈물이 남아있는 걸 보니, 눈물에는 도무지 총량이라고 하는 것이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해 온다.




학교 수업 중 집단상담 수업이 있는데, 집단상담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 배우기 위해 학생들 스스로가 집단원이 되어 집단상담에 참여하는 시간이 있었다. 누군가 문득 좋았던 부모님 이야기를 하며 눈물짓기 시작해 부모님 이야기로 상담의 내용들이 흘러가고 있었다. 나와는 다른 세계의 이야기들이었고, 오고 가는 그 대화들이 나에겐 무의미했었다. 한번 정도 주제의 전환을 시도했었으나, 누군가가 다시 부모님 이야기로 주제를 재전환하면서 나는 그냥 그 과정과 나를 분리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나의 모습이 누군가의 눈에 들어왔는지 나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했다. 


부모님에 대한 애틋한 감정이 과연 실재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어요. 부모님 이야기를 하면 저는 할 말이 없어요.


이 말을 내뱉고는 나에겐 부모님 하면 떠올릴만한, 꺼내어놓을 만한 따뜻한 추억 하나 없는 건가 나 자신이 가여워서 울컥하고 눈물이 쏟구쳤다. 사람들 앞에서 울지 않기로 다짐했었고, 학교 수업 중에 운다는 건 너무 수치스러운 일이기까지 한데도. 게다가 학교 가는 날은 신경 써서 화장도 하는데 말이다.


내 눈물을 보며 누군가가, 나에겐 지난 것들을 이겨낼 충분한 내공이 있음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눈물이 그렇게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던가.


눈물로 사람을 지을 수 있다면 나는 아마도 헐크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신조차도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내동댕이 칠 수 있는 힘을 가졌던 헐크가.



https://www.youtube.com/watch?v=DgfUvyIEsK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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