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그늘에 대하여
“네가 해외로 놀러 다니는 사진을 볼 때마다 내 자신이 너무 초라해져.”
어떤 할아버지 축구 감독은 SNS가 인생의 낭비라고 했다. 시대에 발맞춰 살자는 주의라 그 할아버지의 말이 지극히 시대에 뒤떨어진 말일 뿐이라고 생각했었다. 요즘 SNS는 내가 찾고자 하는 맛집 정보도 많고, 덕후의 세계로 나를 이끈 오빠들의 사진을 보면서 덕질도 마음대로 할 수 있게 해 준다. 나의 지극히 사소한 즐거움과 행복을 저장할뿐만 아니라 SNS를 통해서 부당한 일들이 고발되기도 하고,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돕기 위한 기부금을 모으는 통로로 이용되기도 한다.
그런데 가족들과 해외여행을 하는 사진들이 잔뜩 올라가는 친구의 인스타그램을 보면서 자기 자신을 초라하게 느끼고 있다면 시간낭비의 문제를 넘어 감정까지 낭비하고 있다는 건 분명해 보인다. 친구의 초라한 마음을 전해들은 사람은 그래도 친구를 위하는 마음이 있었던지 그 이후로 SNS 자체를 접었다고 했다. 나 같았음 그건 ‘니 문제고’를 마음 속 깊이 외치며 외면하고 말았을 텐데. 참 도량이 넓은 사람이다.
질투를 하든, 부러움을 느끼든 자신의 감정은 자신이 정리해야 할 몫인데도 그 몫을 친구에게 떠넘겨 버리는 것. 친구가 그런 사진을 올리지 않았다면 자신은 전혀 자극받을 일이 없었을 텐데, 괜히 그런 사진을 올려서 자신을 초라하게 만드는 원인제공을 했다고 느끼는 것. 뭔가 사실과 인지 사이에 부조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느껴지지 않는가?
인터넷에 돌아다니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어떤 남편이 아내의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 쪽이 인스타그램에 자꾸 해외여행 다니는 사진을 올리니 아내가 엄청 스트레스를 받아한다. 그 불똥이 나한테 튀니, 사진을 그만 올렸으면 좋겠다.’
당사자는 친구의 남편으로부터 이런 메시지를 받고 황당한 마음이 든 나머지, 사진을 올리지 말아야 하는 거냐고 익명의 게시판에 글을 남겼다. 그 글 밑에 달린 답변들이 대체로 어떠한 내용들이었는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짐작하리라 본다.
내가 가진 것을 남이 가졌다고 해서 그 사실이 나의 욕구 불만을 자극하지 않는다. 그 사람이 지금 가진 것들을 앞으로 나 또한 가질 수 있는 것들이라고 생각하면 질투의 감정에 동요되지도 않는다. 지금은 비록 여행을 가지 못하지만 조만간에 나도 한번 여행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면 그런 사진 자체가 오히려 정보로서의 역할을 할 것이다. 나도 다음에 갈 때 저기 한번 가봐야겠다 생각하게 되고, 비용은 어땠는지, 숙박은 어떻게 하면 좋은지 친구의 사진들을 보며 물어도 보고, 계획도 해 보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여행이 결코 나의 일이 될 수 없다고 느끼는 순간 해외여행 한번 데려가 줄 능력이 안 되는 남편이 원망스러워지면서 결국 친구가 원흉이라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친구에게도 자신만의 추억을 저장할 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한 내 마음이 우선이다. 질투를 하지 말든지, 자신이 SNS를 접든지 해야 하는데 그 둘을 다 하기는 싫고 상대한테 하라고 한다. 자신을 배려해야 하는 당연한 의무인 것처럼.
나는 웬만해서는 아무리 잘난 여자한테라도 질투의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 명품백 같은 허영을 증명하는 것 외에 쓸 데라곤 하나도 없는 무용지물을 다른 여자들이 아무리 들고 다녀고 별로 부럽지 않다. 나는 책을 사거나 무언가를 배우러 다니는 데 가치를 두는 반면 그녀는 자신이 들고 다니는 것에 가치를 두는 것 뿐이니까. 어디에 가치를 둬야 더 훌륭하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서로의 관심 영역이 다르고 더 가치있게 여기는 범주가 다른 것이기에 남의 영역을 서로 괜히 기웃거릴 필요가 없다는 거다. 그냥 나에게 명품백은 누구나 들고다니는, 똑같이 생긴, 예쁜지 하나도 모르겠지만 어떤 이의 이름값에 지불하는 비싼 물건일 뿐이다. 그런 것들은 돈만 있으면 혹은 돈이 없어도 카드로 얼마든지 긁을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나의 유일한 아킬레스건은 좋은 부모다. 좋은 아버지를 둔 여성들을 보면 부러워 미칠 지경이다. 요리 잘 하고 교양 있는 엄마를 둔 여성을 보면 혼이 빠진다. 그 둘은 내가 어떻게 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아무리 노력해도 나의 능력으로 바꿀 수 없는 존재다.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이 세상에서는 그만 틀려먹고 만 것이다.
나도 그 언젠가 별반 다르지 않은 감정을 SNS에서 느낀 적이 있다.
“아빠, 뭐 하나 부족한 것 없이 지금까지 이쁘게 키워줘서 고마워요.”
전혀 생면부지의 예쁘장한 여성이 자신의 아버지에게 띄운 이 문장 한 줄을 보고 질투의 감정이 용암처럼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심지어 그녀도 하나님을 믿었고, 나도 그랬다. 그 사실을 인지한 순간, 나는 신에게 원망의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나도 당신을 믿고, 그녀도 당신을 믿는데 그녀에겐 참 많은 것들을 주셨네요. 나는 이병헌이 그 옛날 어느 영화에서 자신의 두목을 향해 “나한테 왜 그랬어요?”라고 했던 대사와 아주 똑같은 대사를 신에게 내뱉으며 뻐큐를 날렸다.
그 어떤 것에도 질투의 감정을 느끼지 않는 나를 가장 자극하고 질투하게 만드는 건 남의 집 자상한 아버지다. 그것은 나를 가장 불행한 느낌에 빠지게 하는 중요 요인이다. 절대, 절대로 가질 수 없는. 내 친아버지는 따로 있어서 언젠가는 나를 구원하러 올 것이라는 꿈을 어린 시절부터 내내 상상할 만큼 내 아버지는 나의 불행의 근원이자 컴플렉스였다. 차라리 돈 내고 살 수 있는 것들에 질투를 느낀다면 오히려 더 행운이기까지 한 것 아닌가.
질투는 나의 불행을 비춰주는 거울이다. 내가 어떤 날씬한 여자를 보면서 강한 질투심을 느껴서 아무 이유 없이 그 여자가 싫고, 그 여자만 보면 얼굴이 저절로 찌푸려지고, 그래서 뭔가 하나라도 꼬투리를 잡고 싶다면 당신의 비만은 나의 아버지와 같은 차원의 것이다. 어떤 노력을 해도 절대 갖지 못하는 내 불행감의 근원 그 자체.
사실, 날씬한 그녀에겐, 여행을 다니는 그녀에겐, 자상한 아버지를 둔 그녀에겐 아무 잘못이 없다. 나의 불행감을 건드리는 것은 그녀들이 아니다. 그녀들에겐 내가 불행을 느끼게 하지 말아야 할 단 1%의 의무감도 없다. 그녀들에게도 남들 눈치 보지 않고 자신들의 행복을 마음껏 누려야 할 권리가 있다. 그 앞에서 아무리 떼를 쓰면서, 내가 아니라 너 때문이라고 말 해 본다 한들, 언젠가 그 부끄러움의 몫은 내 것이 될 것이다. 내가 아무리 모른 척 해도 남들 눈에는 뻔히 보일 텐데, 그냥 다수의 사람에게 나라는 사람이 부끄러움도 모르는 부끄러운 사람이 되고야마는 것이다.
추레할 대로 추레한 ‘나’가 있다. 초라할 대로 초라해 병신력에 한 획을 그것도 아주 크게 긋고야 마는 나도 있다. 죽어라 돈을 벌어봐야 제주도 여행 한번 제대로 가기 힘든 그저 그런 인생이 내 것일 때도 있다.
우리에겐 우리의 모습을 비춰주는 거울이 있다. 매일매일 거울을 들여다보며 얼굴을 찬찬히 뜯어볼 필요도 없이, 우리 각자에겐 남들 자체가 아주 큰 거울이 된다. 타인은 내 불행을 비춰주는 거울같은 것이다. 내가 갖지 못한 것 하나하나에 질투를 느끼면서 나의 불행함을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상기시키는 것만큼 나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또 있을까...
“너무 오랜 시간 남들의 모습을 들여다 봤어요.
한참을 그 앞에서 서성이다가 목 놓아 울어버리고 말았죠.
당신도 혹시 그러지 않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