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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술램프 예미 Dec 27. 2018

지금 어떤 아이와 지내고 있나요

우리의 그늘에 대하여

아이를 낳아 키우다보면 어린 시절의 나와 자주 만나게 된다. 내 아이와 나의 모습이 오버랩이 되기도 하고, 나는 어렸을 때 저런 사랑을 받아보지 못 했는데 사랑을 주어야 하는 것 자체가 버거울 때도 있다. 그러면서 묻어두었던 상처들이 하나씩 터져 나오기도 한다.      


엄마들을 대상으로 감정코칭수업을 하다 보면, 누구 하나 그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기 속에 있는 어린 나와 나의 아이를 같이 키우게 된다. 내 아이를 대할 때면 어린 시절 나를 대했던 엄마의 모습이 살아난다. 나를 괴롭히기도 하고, 엄마가 나를 대했던 것과 똑같이 내 아이를 대하고 있을 때도 있다. 엄했던 아버지 밑에서 자란 사람들은 엄마가 되고 난 후, 어떤 강박을 보이기도 한다. 지나치게 깔끔하게 아이를 키운다든지, 아버지의 모습에 대항해 엄한 것과는 아주 거리가 먼 양육방식을 취할 때도 있다.      


부모가 나와 스킨십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생각하면서도 어느 순간 부모처럼 아이와의 스킨십을 힘들어한다. 어떤 엄마는 마음으로는 아이와의 스킨십이 너무 싫었지만 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억지로 하고 있을 때도 있다고 했다. 속으로는 불편했지만 자신이 어린 시절 느꼈던 애착의 결핍과 좌절의 감정을 내 아이에게까지 물려주고 싶지 않아서다.      


나는 엄마라는 이름을 달고 난 후, 어린 시절의 나를 더 자주 만났다. 때로 그 아이는 내 아이를 보며 질투하고 있기도 했다. ‘나는 어렸을 때 그렇게 챙겨주는 엄마가 없었는데 너는 참 좋겠다’ 부러워하기도 했다. ‘나는 그런 거 먹어보지도 못 했는데, 너는 참 복에 겨워서 투정부리고 있구나’ 화가 날 때도 있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수시로 울어댔다. 나도 같이 돌봐달라고 떼를 쓰고 있었다.      



이는 엄마들에게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몸은 자라지만 마음은 자라나지 못 하는 사람들이 많다. 부모에게서 받지 못했던 것들을 연인이나 배우자에게서 보상받으려는 사람들도 있고, 외로웠던 내 자신을 상대에게 완전히 의지해버리는 사람들도 있다. 어디에서도 받지 못했던 관심을 데이트 상대에게 요구하기도 한다.   

   

이제 여성들은 남자친구에게 이별을 고하는 것조차 폭력을 당할 각오를 미리 해야 할 정도가 됐다. 데이트폭력을 가하는 남성들은 주로 고립된 남성들이 많다. 세상으로 통하는 문이 오직 여자 친구밖에 없는 것이다. 그 문이 갑자기 사라진다는 것은 이제 밖으로 나갈 문자체가 사라진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 불안함이 그를 폭력적으로 만들어버린다. 폭력을 가해서라도 문을 지키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이별을 고하는 여자 친구에게 자신을 따돌렸거나 자신을 외롭게 만들었던 모든 사람들의 모습을 대입해 버린다. ‘너도 그들과 똑같구나’ 생각하게 된다. 자신의 결핍을 상대의 탓으로 돌려버린다.     


아버지로부터 시작된 결핍을 남자친구에게서 채우려는 여성도 있고, 어머니의 부재에서 비롯된 결핍을 여자 친구에게서 보상받으려는 남성도 있다. 엄마로부터 버림받은 어느 남성이 자신이 주문한 새우를 내가 까주었으면 바란 적이 있다. 사귀는 사이도 아니었는데 새우를 까주는 행위는 너무나도 친밀한 행위였기에 나는 그런 마음을 모른 척 했다. 그는 자기의 연인도 아닌 사람에게서 엄마의 따뜻함을 받고 싶었던 거다.     

 

우리 속에 있는 그 아이는 도대체 누가 위로해 주어야 할까? 실은 내 부모가 위로해줘야 한다. 지금은 다 커버린 성인이라 할지라도 그 보상은 그것을 주어야 하는 사람에게서 되돌려 받아야 한다. 그때 나한테 주지 못 했으니, 지금에라도 사과를 하든지 나한테 달라고 요구해야 한다. 부모가 더 이상 이 세상에 있지 않은 경우라면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나를 회복시켜 달라고 해야 한다. 그래야지만 우리 안의 아이를 진정시키고 괜히 애먼 사람을 잡지 않게 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부모에게 차마 이런 말을 할 수 없어서 내 안의 아이를 부등켜 안고 울거나, 다른 사람을 들들 볶게 된다. 혼자서 어린 나를 달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달래야 하는 옳은 상대가 달래지 않을 때 회복이 쉽지 않다. 가만히 있으라는 말로는 해결되지 않을 때가 많다. 때로는 그 아이를 모른 척 하고 싶겠지만, 내가 의식하든 하지 못 하든 그 아이는 어느 때든 문제를 일으키게 되어 있다.      


나는 가끔 어린 시절 나를 괴롭혔던 친구를 꿈속에서 마구마구 두들겨 패줄 때가 있다. 현실에서도 이런 마음은 굴뚝같지만 사회적 위신과 체면이 있기에 그냥 꿈속에서라도 복수해야지 별 수 없다. 꽤나 자주 오랜 시간 동안 이런 꿈을 꾸다가 더 이상 꾸지 않게 된 걸 보면 꿈속에서라도 꽤나 속이 풀린 것 같다. 이 정도는 어쩌면 유머로 승화할 정도의 것일지도 모른다. 모든 상처가 꿈 속 보복만으로 해결되지 않으니 오늘 나를 위로할 방법을 기를 쓰고 찾아야만 한다.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아직 미혼인 여성들과 남성들과 중성들 모두 연애 전에 혹은 결혼 전에라도 이것을 해결해야만 한다고 감히 말한다. 누군가와 만나게 되면 어린 아이는 반드시 깨어난다. 상대에게 보살핌을 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만약 만남 이전에 자신의 어린 자아를 위로하고 잠들게 하지 못 한다면 자칫 내가 데이트폭력의 가해자 혹은 피해자가 될 수 있고, 부부싸움을 끝장나게 하다가 결국 결혼생활을 끝장내 버릴 수도 있다.   

   


“당신은 지금 어떤 아이와 살고 있나요?
그 아이를 달래지 않으면 내내 속이 시끄러울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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