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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술램프 예미 Oct 30. 2020

예민함과 무례함의 불화

예민은 무례를 경계하고, 무례는 예민을 침범한다. 방어와 공격의 싸움은 주로 공격이 이기는 편이다. 방어는 수동적이고 소극적 성격을 가졌지만, 공격은 능동적이며 적극적인데 저돌적이기까지 하니. 그래서 예민함 앞에 ‘극도의’ 정도의 수식어는 붙어줘야지만 겨우 무례함을 쫓아낼 수 있다. 그럼에도 극도의 무례함을 만나면 극도의 예민함도 질 수밖에 없지만.


 이런 식이다. 누가 음식을 같이 떠먹는 걸 싫어한다고 말하면 어떤 사람은 상대의 호오를 존중해서 각자 덜어먹는 데 동의한다(근데 이게 동의하고 말고의 문제인가 정녕. 이건 어디까지나 서로에 대한 에티켓의 영역 아닌가).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들은 극도의 무례한 자는 ‘그건 네 사정이고’를 노골적 행위로 표현해 버린다. 


 한 연예인은 서양 권에서 오랫동안 생활한 탓에 국을 같이 먹는 한국의 문화를 혐오했다. 함께 사는 형에게 국을 각자 떠먹자는 말을 반복했으나 고쳐지지 않자 급기야 연예인은 형을 향해 소리를 빽 질렀다고 한다. 그랬더니 형은 더 큰 소리로 연예인을 향해 집에서 나가라고 했단다. 사실, 그 집은 형의 집이었고, 거기에서 얹혀서 살던 연예인은 결국 다 같이 국을 떠먹는 것에 항복 선언을 하고야 말았다. 


 나는 연예인처럼 서구권에서 단 한 번도 살아본 적이 없었지만, 어느 순간 누군가와 침을 섞으며 밥을 먹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어른이 된 후에는 엄마와도 음식을 같이 떠먹지 않게 되었고, 아이들과는 식기조차도 공유하지 않는다. 요즘처럼 한 번의 전염병이 온 세계를 강타하고 지나가 수 백 명의 목숨정도는 가볍게 앗아가는 시대에는 남과 무언가를 공유한다는 것이 위험을 무릅써야하는 지경에까지 이르지 않았던가. 


 어느 날 친구들과의 모임이 있었다. 다 같이 밥을 먹는데 한 친구가 자기 숟가락으로 전골의 국을 떠먹으려고 하기에 덜어먹자고 했다. 열 명이 넘는 친구들이 모인 자리였고, 모든 숟가락이 전골 속에 들어가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아찔했다. 친구는 나를 한번 스윽 쳐다보더니, 여 보란 듯이 숟가락으로 국을 떠먹었다. 그는 아마도 친구끼리 같이 떠먹을 수도 있지 뭐 그런 걸로 예민하게 구나, 내가 지금 더럽다는 말이냐 등등의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저 친구와 세균을 동일시하지 않는 것일 뿐. 친구는 믿을 수 있지만 그가 가진 세균은 믿지 못하며, 친구와는 친하게 지낼 수 있지만 그가 지닌 바이러스와는 절대 친해질 수 없을 뿐이었다. 이걸 세균이 더럽다가 아니라 내가 더럽다고?로 받아들여 싸우자면 곤란하다.


 이렇듯 예민과 무례는 자주 충돌한다. 아이 손을 만지지 말라는 엄마의 말 같은 건 간단히 무시하면서 계속 남의 아이 손을 만지작거리는 사람도 있고, 사생활 노출을 꺼리는 사람의 비밀을 무참히 까발려버리는 사람도 있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하고 싶은데 일일이 참견과 조언을 일삼는 사람이 있고, 자신만의 프라이빗한 공간을 침범당하는 것을 못 참는 사람에게 연락도 없이 무턱대고 찾아가는 사람도 있다.  


 종종 무례함은 똘기를 동반하기도 한다. 똘기 넘치는 무례함을 극도의 예민함이 이겨 누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므로 예민한 사람 혼자서 바들바들 떨고야 마는 경우가 많다. 누구나 무례할 수는 있어도 아무나 예민할 수는 없기에 예민한 것이 보편적으로 이해받기도 힘들다. 예민한 사람들은 그렇게 되기까지 상처 받는 순간이 많았고, 그래서 상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며, 남들의 눈치를 살펴 누구 하나라도 불편해지는 상황 자체를 힘들어 했을 수도 있다. 예민하기에 독할 수는 없어서 뭐라고 항변을 하거나 속엣 말도 제대로 꺼내지 못 한 채 혼자 속병만 앓곤 했을 것이다. 


 그래서 무례함으로부터 공격받고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는 초초초 독기가 필요하다. 무례한 사람들은 특히나 예민한 사람들의 예민함을 찢어발기고 싶어 하고 해체된 예민함을 보며 희열까지 느끼므로 예민해서 연약한 혹은 연약해서 예민한 자아를 지키기 위해서는 독해지리라 주문을 걸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소통에서 오는 부식된 균들이 예민함을 오염시키기 마련이니까. 더욱이 공감이 지나치고 타인의 감정에 민감한 사람들은 자신의 예민함을 감추거나 예민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면서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 바꾸기 위해 애 쓰기까지 한다. 나의 예민함으로 타인이 고통 받을까, 타인이 나를 싫어할까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고 결국 ‘저 사람은 예민해서 저 모양이다’라는 모종의 분위기에 압살당하는 것이다. 


 예민해서 살이 찌지 않는다, 예민해서 소심하다, 예민해서 까칠하다 등등 예민한 사람을 정의하고 규정하기 위한 시도들은 낯설지 않다. 어떻게든 예민함에 부정적인 프레임을 씌워서 예민의 부정성에 과몰입하는 집단의 공격이 무수히 행해진다. 예민함이, 예민한 사람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때로는 그냥 꼴 보기 싫은 이유에 불과할 때도 많다.  


 사람은 모두 입체적이라 예민한 사람이라고 예민함만을 가진 것이 아니라 특정한 부분에 대해서만 예민하다. 나처럼 결벽에 대한 예민이 특히 강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일 처리에, 누군가는 관계에 제각각 다른 예민함을 소유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예민한 구석이 단 하나도 없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조차 어느 부분에서는 자신만의 예민함이 있기 마련이다. 단지, 누군가의 예민함이 내가 가진 예민함과는 어떤 접점도 없을 때 나의 예민함은 묻어두고 다른 이의 예민함에 과민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모든 문제의 근원이 나의 예민한 성격에 있다고 생각하고선 가끔 나의 예민함을 외면했고, 남에게 들키지 않으려 노력했고, 예민함을 꽁꽁 숨기고 덮어 편안해 보이고 싶었다. 털털해 보이고 싶었고, 사랑받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예민했기에 여태 죽지 않고 살아있는 사람이었다. 예민한 감성과 감정으로 글을 쓰고, 예민한 시선으로 사물과 사건을 대하고, 예민한 공감으로 남을 돕기도 한다. 예민함으로 인해 돈을 벌어먹고 있기까지 하다.


 때문에 나의 예민한 영역을 무시하고 침범해 고유한 특성을 유린하고 약탈하려는 사람에겐 이제 정확하고 당당하게 말해주리라. 나는 나의 예민함으로 인해 살아가고 있으며 그것으로 인해 큰 물줄기를 이루고 있음을, 나와 당신과 세상의 크고 작은 일들을 알아가고 있음을. 그러니 제발 내 앞에서만큼은 오만하게 굴지 말라고. 부끄러운 줄도 모른 채 감정에 예민하지 못한 무지를 드러내는 것은 내가 가장 참기 힘든 것이라고. 


 민감함 없이 세상을 산다는 건 다른 이들의 인생에 끊임없이 상처를 주는 일일 테니 자신의 무딘 감정과 무례를 돌볼 때가 되지 않았을까. 예민함도 나름의 질서이니 그것을 깨뜨리기 위해 애쓰는 것보다 경계를 지킬 매너 정도는 이제 갖추는 것이 어떠한가.


 취하지 않고, 바꾸려들지 않으며, 마음 밖의 사람들과 공존하는 방법을 배워가는 것은 누구 한 사람만의 몫은 아닐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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