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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술램프 예미 Jun 08. 2016

너희들을 기억해

아직도 가끔 너희들을 떠올리며 기도하곤 해

사랑하는 이로부터 버림 받아 끔찍한 모습이 되어버린 남자들이 뉴스 속을 장식할 때가 있다. 나는 그들이 여자보다 자신이 우월하기 때문에 감히 네까짓 게 나를 버리냐는 앙갚음으로 그런 모습이 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가끔 버려진 남자가 그래서 외로운 남자가 얼마나 처절해지는지,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 이미 어렸을 때 가까이에서 보곤 했다. 


그는 아내에게 버림 받아 젊은 나이임에도 삶을 놓아버린 술주정뱅이였고, 인생의 낙오자였으며, 폭력을 일삼는 아빠였다. 자신을 버리고 떠난 아내에 대한 분풀이를 남겨진 아이들에게 풀어내고 또 풀어내어도 분노와 상실감이 가시지 않는 듯 했다. 그 날도 아이들은 살려달라고 울부짖었다. 아침부터 통곡의 소리들이 내 귓가에 전해져와 너무 놀라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거기엔 두 남자 아이가 크고 깊은 고무다라이에 들어간 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간혹 비가 오면 비를 받아두는 용도로 쓰였을 것 같은 고무다라이에는 차디 찬 물이 한 가득 들어 있었고 그 곳에 연년생이었던 두 남자 아이가 벌거벗긴 채 나를 바라보며 애원하였다. 나도 고작 초등학교 3학년이었는데 혹시라도 내가 자기들을 구원해줄 수 있지는 않을까 나를 바라보며 그렇게 살려달라 했다.



할 수만 있다면 아이들을 그 곳에서 꺼내어 주고 싶었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며 '어떡해, 어떡해...'만 되풀이했다. 이윽고, 방에 있던 그가 나와서는 형제들을 향해 저주의 말들을 퍼부어댔다. 그래, 버림받은 남자가 장난끼 심하고 에너지 넘치는 연년생 형제들을 홀로 키워내는 것은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제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그에게, 제 마음 하나 어찌할줄 모르는 그에게 아이들이 얼마나 짐스러웠을까. 아이들은 곧 고아원에 갖다 버려질 거라 했다. 그러고는 울부짖는 아이들 소리가 듣기 싫었던지 고무다라이의 뚜껑을 닫아버렸다. 차가운 물 속에서, 어둠 속에서 얼마나 무서웠을까...


고아원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울며불며 기도를 했다. 

"하나님, 제발 저 아이들이 고아원에 가지 않게 해 주세요~"

내 기도는 형제들의 울부짖음 만큼이나 간절하고 처절했다. 이후 아이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로 이사를 간다고 하였다. 


지금도 가끔 그 형제들을 떠올린다. 어디서 잘 살고 있을까, 가출을 하거나 빗나가지는 않았을까, 둘이서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 주었을까... 아직도 그 때 물 통에서 벌벌 떨고 있던 그들의 모습이 생생하다. 그리고 소리도 내지 못한 채 두려움에 떨었던 나의 모습도 함께 떠오른다.


아이들은 언제나 늘 그렇게 버려질까 전전긍긍 해야하는 존재들인건가 생각했었다. 나도 늘 버려질까 두려웠다. 너를 버릴수도 있다는 선언은 아이의 뇌와 마음을 망가뜨린다. 노여운 얼굴만 해도 아이들은 겁을 먹을텐데, 회초리만 들어도 아이들은 충분히 겁을 먹을텐데 그렇게 고문하듯이 물 속에 집어넣어야 하며 폭력을 휘둘러야 했을까. 너를 버리겠다 말해야 했을까.



내 아비도 그랬다. 늘 칼을 들고선 내 손가락을 잘라버리겠노라 위협하였고, 급기야 내 몸에 칼로 흠집을 내었다. 언젠가는 새끼손가락 하나 정도는 그냥 잘려나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늘 떨어야했다. 초등학교 1학년 즈음, 내 손이 도마에 놓여지고 그 위로 서슬퍼런 부엌칼이 놓였을 때의 충격과 공포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 칼은 두 눈을 가지고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형제들처럼 살려달라는 말도 못 했다. 너무 무서우면 패닉상태에 빠져 그런 소리조차 낼 수 없다는 것을 그 때 처음 알았다. 그리고 나는... 너무 어렸다.


내 신체의 일부가 잘려나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어야 한다면 그냥 죽는 편이 낫다는 생각을 했었다. 아이들은 자아라는 것이 생겨야 자살이라는 것도 생각할 수 있다. 초등학교 3학년 정도가 되어야 비로소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생각해 볼 나이가 된다. 난 그 당시부터 끊임없이 내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될까봐 두려웠다. 칼이 내 몸을 지나 솓구쳤던 피는 아직도 내게 돌아오지 못했다. 


날아오는 주먹에 맞아 멍들고 부은 눈을 누가 볼까 가리고 또 가려야 했다. 중학교 2학년때 담임선생님이 출석부 정리를 다 했으니 방학 전에 절대 아무도 빠지지 말라 했는데, 그 말이 어떤 예언이라도 된 것마냥 그날 주먹으로 맞아 눈이 너무 부어오르고 멍이 심각하게 들어 다음 날 학교에 가지 못했다. 나 때문에 출석부 정리를 다시 해야 한다며 늙은 담임은 투덜투덜댔다. 그렇게 대학교 1학년때까지 맞아야 했다. 그 이후에 아비에게 작은 중풍이 찾아와 한 쪽 손을 잘 못 쓰게 되면서 폭력은 비로소 끝이 났다.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길에서 주먹으로 맞아야 했을 때는... 마음에서 소망이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려와 그 자리에서 한 발짝도 떼지 못한 채 우두커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가끔 칼을 들고 무언가를 깎아야하거나 썰어야할 때면 칼에 잘 베이곤 한다. 그래서 지금 우리 집에는 부엌칼이 없다. 언젠가 바닥에 놔뒹굴었던 부엌칼이 나에게 어린시절 기억을 가져다 주었고 이후로 부엌칼을 버리고 새로 사지 않았다. 음식을 할 때 과도로 요리를 한다. 심지어 깍두기를 담글 때도 부엌칼로 무를 자르면 내 손이 잘려나갈 것만 같아 과도로 무를 썬다



그 형제들은... 아직 살아있을까를 생각하기도 한다. 그리고 볼 수는 없지만, 잘 살게 해달라고 어디선가 행복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그래도 혼자만의 외로움이 아니었으니 다행이라 여기기도 한다. 서로의 아픔을 끌어안고 부디 열심히 살아내주기를...


기억 속에 없을지도 모를 누나가 지금도 너희들을 기억하고 있어. 가끔 너희들의 이름을 조용히 불러보곤해. 어디서든 힘 내... 행복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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