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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미 7시간전

사랑, 1000자

 내게는 천일하고도 이백삼십일 넘게 만난 애인이 있다. 이름은 oo, 나이는 동갑, 직업은 간호사. 입사 1년 차 신입이라 한창 3교대 근무가 정신없을 때라 얼굴 보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인지 3년 반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을 함께했음에도 여전히 만나면 애틋하고 헤어질 땐 떨어지기 싫은 우리다.


 지난 주말, 오랜만에 왕십리 데이트를 했다. 데이 근무 끝에 몰려온 피로를 잠재우려 약속 시간 직전까지 자고 일어난 그의 얼굴은 하얗고 말간 것이, 안쓰러우면서도 귀여웠다. 마치 낮잠을 자고 일어난 세 살배기 아기의 따끈한 등이나, 꼬순내 나는 새끼 강아지의 배를 쓰다듬고 싶은 기분이었다. 사방이 오픈된 식당에서 차마 그런 애정행각을 보일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우리는 서로를 꿀 떨어지는 눈빛으로 바라보다가도, 눈앞에 있는 볶음밥을 열심히 퍼먹었다. 팬의 바닥이 다 드러날 때쯤, 습관적으로 “밥 먹고 뭐 하지?”라고 말하면서도 숟가락을 놓지 못하는 그의 모습에 나는 눈을 떼지 못했다. 친구들과 모인 자리였다면 이미 카페나 술집 같은 다음의 행선지를 정하느라 지도 앱을 켜놓고 눈이 빠져라 스크롤만 내리고 있었을 나지만, 이상하게 그의 앞에선 ‘J’가 아닌 ‘P’가 된다. 몇 년 전에는 완벽한 데이트라는 것을 꿈꿨던 것도 같은데, 요즘은 그냥 밥 먹으면 소화시킬 겸 걷고, 그러다 보이는 마트에 들어가 발길 닿는 대로 구경하는 그런 평범한 시간들이 좋다. 왕십리를 산책하기 좋은 곳이라 소개하는 사람은 몇 없겠지만, 그날의 우리는 적당한 날씨와 크게 불편하지 않은 신발 덕분에 오래오래 걸을 수 있었다. 어두운 골목길, 모르는 아파트 단지, 거대한 육교 그런 것들은 아무래도 좋았다. 왕십리는 이제부터 ‘산책해서 좋았던 곳’으로 기억될 테지.


 나는 그에게 손잡고 걷는 이 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그 말을 곱씹어 보면서 조금 쑥스러운 생각을 했다. 평범한 것들이 결코 평범하지 않게 느껴지는 것, 바로 오늘 같은 하루가 내가 하는 사랑이 아닐까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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