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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mbrella Oct 16. 2020

또다시 잠이 오지 않아 쓰는 글

잠이 오지 않는다. 아까 저녁에 잔 낮잠 때문일까. 잠이 안 오면 우울하다. 우울해도 잠이 안 온다. 이젠 우울해서 잠이 안 오는 건지 잠이 오지 않아서 우울한 건지 모르겠다. 그래서 불면이 힘들다. 유를 알 수 없는 싸움이다. 잠과 우울은 뗄 수 없는 관계다. 서로 엉켜 붙어 있다. 징그러울 정도로 붙어 있다. 오늘은 왜 잠이 오지 않는 걸까. 글 때문다. 그놈의 글 때문이다. 지난 3개월 동안 내 일상은 온통 글이었다. 비영리 독립 언론에 들어가 기자가 됐다. 몇 달 전 ‘인턴기자’의 존재를 알았다. 학생 신분에 글을 쓰면서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설렜다. 대학알리는 그래서 들어간 거다. 인턴기자가 되기 위한 스펙으 위한 기자 되기였다. 써보고 싶은 글이 많았다. 시간이 지났다. 3개월이 지났다. 6편의 글을 출판했다. 적지 않은 수라고 생각한다. 열심히 썼다. 이 세상에 객관적인 글은 없다며 기사의 프레임을 뽀개버리겠다며 치기 어린 글을 썼다. 기사 답지 않은 기사란 말도 들었다. 건 말을 들을 때마다 싸웠다. 확실히 내가 기사라고 내놓은 것들은 기존의 기사들과 달랐다. 내  호명할 때면 항상 스파크가 일었다. 발끈하는 건 내 쪽이었다. 애써 찾아낸 합의점은 ‘기사톤이 아닌 기사’라는 명명이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들이 내 기사를 존중하지 않는 게 아니다. 그저 내가 이런 이름에 지극히 예민한 인간일뿐이다. 출판된 기사들을 봤다. 이걸 기사라고 ᆯ 수 있을까. 기사의 프레임을 부숴보려고 쓴 기사였다. 근데 스스로도 내 글이 기사라고 단언하지 못한다. 왜 이런 지지부진한  싸움을 혼자 하고 있는지 돌이켜 봤다. 기사라는 걸 써보고 싶어서 이 들어온 거였다. 진짜 기자가 되어보기 위해 들어온 거였다. 근데 정작 여기 와서 하고 있는 거라곤, 기성 언론의 문법을 지적하고 헤집고 있는 거다. 나 자신도 내가 이해되지 않았다. 목적 없는 쑴이다. 싸움의 목적도, 결말도, 가치도 보이지 않는다. 모든 게 흐리멍덩한 이 싸움을 왜 혼자 붙들고 있는 걸까. ᄉ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글쓰기가 역겨워졌다. 글은 꼴도 보기 싫었다. 그런데 워낙 기억하고 기록하는 걸 좋아하는 인간인지라 글쓰기에 대한 역겨움을 글로 쓰고 있다. 쓰면서도 어이가 없다. 왜 잠이 오지 않는지, 왜  글이 써지지 않는지 생각해봤다. 오워서다. 하지만 웃기게도, 내 글쓰기는 외로움의 발로다. 외로웠고, 그래서 썼다. 이 마음을 나라도 기억해야지.라고 하며 썼다. 작문이라기 보단 기록에 가까웠다. 이 감정을, 이 경험을 기억하기 위한 쓰기였다.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 비웃음을 살까 두려웠다. 나를 위로하기 위해 쓴 글이 누군가에겐 치기 어린 글로 보인다면 그땐 진짜로 무너져 버릴 것 같았다. 꼭꼭 숨겼다.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 내 외로움을 극복하는 것보단, 타인의 외로움을 해소하는 게 더 빠르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내 이야기를 썼고, 내 주변의 이야기를 썼다. 기사로 그 존재들을 긍정하고 싶었다. 응원하고 싶었다. 사람들이 관심 갖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내가 기사로 재현한 이 사람만 흡족하다면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지금 보니 어이없다. 외로움이 나 하나 끄적거린다고 해결되는 문제던가. 사실 이 목적과 다짐을 까먹었다. 이걸 쓰다보니 다시 생각났다. 왜 이 목적이, 이 다짐이 오래가지 못했을까, 금세 잊혔을까. 사실은 나를 보여주고 싶었던 거다. 내 글은 결핍의 결정체였다. 사실 나 사랑받고 싶어, 사실 나 너무 외로워 외치고 있었던 거다. 내가 너에 관해 이렇게 귀 기울고 공들이는 만큼 너도 내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구걸하는 거였다. 결국 나를 위한 쓰기였던 거다. 내 글은 배설물이다. 어리고 결핍된 내가 담겨있다. 이런 글을 읽어달라고 여기저기 올려대니 죄책감이 밀려온다. 그러면서도 결국 난 이 글을 발행할 거다. 어떻게든 내 흔적을 남기고 싶어서. 이 밤을, 이 외로움을 기록하고 싶어서. 외롭다. 지긋지긋하고 끔찍하다. 극복했다고 생각해도 어느 순간 다시 찾아온다. 불면이 싫다. 밤은 항상 외롭다. 내 옆에는 엄마와 누워있다. 나는 엄마와 나란히 누워서 잔다. 내 옆에 아무도 없는 게 아니다. 그런데 엄마의 색색 거리는, 엄마의 곤한 수면을 보고 있자면 끔찍하게 외로워진다. 공간과 내면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 때문일 거다. 혼자가 아니라서 울 수 없다. 악을 쓰고 소리 지를 수 없다. 그래서 끔찍하게 외롭다. 우는 것 하나 내 맘대로 되지 않는데, 만사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 울고 싶은 이유는, 소리를 내고 싶은 이유는 사실 목격되고 싶어서다. 외로움을 들키고 싶어서 그런 거다. 혼자이고 싶지 않아서 울고 싶은 거다. 하지만 울지 못한다. 차마 소리를 낼 수 없다. 그래서 결국 또 쓰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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