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금의 값>과 토드 헤인즈의 <캐롤>
캐롤과 테레즈의 탄생
패트리샤 하이스미스(Patricia Highsmith)는 현대영화사에서도 중요한 흔적을 남긴 작가로, 무시무시한 코미디이자 뒷맛 씁쓸한 스릴러인 히치콕의 <열차 안의 낯선 자들>의 원작을 썼다.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사이코패스 살인자’ 캐릭터인 ‘리플리’가 등장하는 일련의 <재능있는 리플리> 시리즈는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대표작인데, 이 시리즈는 몇 차례에 걸쳐 영화화되었다. 1960년 르네 클레망이 연출하고 알랭 들롱이 리플리를 연기한 <태양은 가득히>, 1977년 빔 벤더스가 연출하고 데니스 호퍼가 리플리를 연기한 <미국인 친구>, 1999년 안소니 밍겔라가 연출하고 맷 데이먼이 리플리를 연기한 <리플리>, 2002년 릴리아니 카바니가 연출하고 존 말코비치가 리플리를 연기한 <리플리스 게임>에 이르기까지. 몇 번이고 반복해 돌아오는 ‘리플리’는 패트리샤 하이스미스가 들여다본 악의 심연이 어느 정도의 깊이인지 가늠해 볼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같은 캐릭터이다.
하이스미스가 1952년 발표한 <소금의 값>은 그의 소설들 중에서도 흥미로운 요소를 가지고 있는 작품이다. 우선 <소금의 값>은 범죄적 인간과 그들을 둘러싼 군상의 이야기를 날선 시선으로 옮긴 범죄소설이 전문이었던 하이스미스의 작품들 중에서 드물게 순수한 ‘멜로’ 장르의 소설이다. 동시에 패트리샤 하이스미스 본인의 경험이 직접적인 창작의 동기가 된 레즈비언 소설이다. 실제로 1948년 블루밍데일 백화점 완구판매 코너에서 2주간 임시로 일했던 패트리샤 하이스미스는 매장에 방문했던 캐슬린 위긴스 센이라는 사람에게 강렬한 끌림을 느꼈다. 이 모티브에 또 한가지 실제 경험이 엮여들었다. 하이스미스와 한동안 연인관계였던 버지니아 켄트 캐더우드는 호텔에서 가졌던 레즈비언 관계가 녹음되고, 이 동성애 성향을 이유로 딸의 양육권을 빼았겼다. 여기까지 이야기하면 ‘테레즈’와 ‘캐롤’이 어디에서 왔는지 능히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클레어 모건' 명의로 출간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1952년 이 소설이 처음 출간되었을 때 패트리샤 하이스미스는 ‘클레어 모건’이라는 필명으로 출간했다. 이는 당시 미국사회가 ‘동성애’를 바라보던 시선과 관점으로부터 우회하기 위해서, 자전적이고 내밀한 이야기로 인한 사생활 노출의 우려로 인해, 동시에 작가로서의 이미지가 고착화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1952년, 미국정신의학회는 ‘동성애’를 정신적인 질환에 편입시킨 매뉴얼을 발표했다. 영화 <캐롤>에서 주인공 캐롤이 심리상담을 받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동성애를 ‘정신적인 질환’이 아닌 것으로 인정하여 매뉴얼에서 빠진 것은 1973년에 가서야 실현되었다. 동시에,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데뷔작 <열차 안의 낯선 자들>의 성공으로 패트리샤 하이스미스는 ‘서스펜스 소설가’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었다. 본인의 이름으로 <소금의 값>이 발표된다면 이후로는 ‘레즈비언 작가’라고 불리게 될 터였다. 패트리샤 하이스미스는 본인의 작품에 작가 개인에 대한 선입견이 끼어드는 것을 원치 않았다.
패트리샤 하이스미스는 타계하기 5년 전, 그가 74세였던 1990년에야 비로소 <소금의 값>을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하는 것에 동의했다. 이에 <소금의 값>은 1990년 블룸스버그에서 재출간될 때 <캐롤>이라는 제목과 패트리샤 하이스미스라는 작가의 이름을 되찾았다. 그래서 지금은 이 소설을 <캐롤>이라는 원래 제목으로 부른다. 하이스미스가 처음 원했던 제목도 <캐롤>이었다. 영화 <캐롤>에서는 원작을 표기할 때 제목은 <소금의 값>으로, 작가는 패트리샤 하이스미스로 표기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구분의 편의를 위하여 원작 소설은 <소금의 값>으로, 영화는 <캐롤>로 표기한다.
각색작가인 필리스 나지(Phyllis Nagy)의 비전은 영화 <캐롤>을 구성하는 주춧돌이다. 필리스 나지는 1987년, 뉴욕타임즈에 근무할 때 패트리샤 하이스미스를 만났고 곧 깊은 우정을 쌓았다. 필리스 나지가 영화 <캐롤>의 초고를 쓴 것이 1996년이고, 영화가 개봉된 것이 2015년이니 필리스 나지에게 있어서 <캐롤>은 근 20년을 쏟은 프로젝트였던 셈이다. 소설을 영화 <캐롤>로 각색하면서 필리스 나지는 등장인물들이 ‘현대적’인 사고방식과 소통방식을 가진 인물들로 보이지 않게 안배했다. 필리스 나지에게 있어서 <캐롤>은 교조적인 텍스트가 아니라, ‘본능’이라는 원초적 감정에 휩쓸린 이들이 자신이 앓는 열병의 무엇인지를 알아가는 과정에 더 가까웠던 것이 아닐까 싶다.
초기 제목이었던 <소금의 값>은 훗날, 패트리샤 하이스미스가 성경에서 따온 제목임을 밝혔다. 다만 정확히 어디서 인용한 것인지는 밝히지 않았는데, 영화 <캐롤>의 각본을 쓴 필리스 나지는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에서 인용했을 것으로 생각했다. 타락의 도시 소돔에서 탈출하던 롯의 아내는 뒤돌아보지 말라는 경고에도 뒤를 돌아보았다가 소금기둥으로 변했다. 이제 서로를 만나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넌 테레즈와 캐롤의 이야기를 성경의 소금기둥에 비유한 셈이다.
<소금의 값>과 <캐롤> 사이
필리스 나지와 토드 헤인즈는 이런 다층적인 맥락을 가진 소설 <소금의 값>을 영화화하면서 생각보다 적극적인 개작을 거친다. 물론 원작이 전달하고자 했던 주제의식과 감정선을 해치지 않는 선을 유지하지만, 소설 속에 나온 여러 ‘설명’을 생략하는 선택을 내린다. 원작과 영화의 가장 큰 차이는 이 ‘설명’의 태도이다.
<소금의 값>에서는 테레즈의 가족관계가 명확히 밝혀진다. 반면 영화에서는, 다정했으나 테레즈가 어렸을 때 죽은 아버지, 자신을 정신적으로 학대했던 어머니, 어머니의 재혼으로 인해 생겨난 두 명의 이부동생 등은 모두 생략되어 있다. <캐롤>의 테레즈가 처음 백화점에서 일하는 장면 이후 다시 ‘노동’으로 돌아가는 것은 캐롤과 여행에서 돌아온 다음이지만, <소금의 값>의 테레즈는 캐롤과 여행을 가기 이전에도 직업으로서 무대 디자인 일을 하고 있다. 소설 속 캐롤은 테레즈를 만나기 이전에 애비와 가구점을 1년가량 운영한 것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가구점을 하는 이유는 ‘하지와 떨어져 있고 싶어서’다. 즉 ‘생계를 위해’ 노동해야 하는 테레즈와 ‘생계가 목적이 아닌’ 캐롤의 노동은 확연히 구분된다. 캐롤과 테레즈 사이에 ‘화폐’도 자주 오고 간다. 소설 속에서는 두 사람의 관계 기저에 경제적, 계급적 불균형이 매장되어 있음을 숨길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영화 <캐롤>에서 경제적, 계급적 위계는 최대한 간략하게 표현된다. 테레즈의 노동은 최소화되어있고, 캐롤과 테레즈의 관계에서 금전을 주고받는 장면도 없다. 영화 자체만 본다면 계급적인 위계를 ‘숨기지 않는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소금의 값>과 비교한다면 두 사람을 둘러싼 외부적 요인들을 가능한 최소화 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두 주인공의 계급적 차이를 포함해 <소금의 값>은 독자에게 숨기고 싶은 것이 별로 없어 보인다. 하지만 <캐롤>은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것을 직접 이야기하기보다, 점층적으로 쌓여 가는 이미지 안에서 유추하길 유도한다. 단적인 차이로 영화 <캐롤>에서 캐롤과 여행을 가기 위해 짐을 싸는 테레즈를 리처드가 힐난하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이 장면에서 테레즈가 캐롤에게 매혹되어 있다는 건 확실하지만, 그게 ‘어떤 정도의 수준’인지 혹은 테레즈의 심리상태가 ‘캐롤을 만나기 전에 비해 어느 정도로 변화된 건지’는 알 수 없다.
<소금의 값>의 테레즈는 이 시점에서 이미 캐롤이라는 존재를 강렬하게 욕망한다. 소설에서는 애초에 두 사람의 관계가 진척되는 계기부터가 다르다. <캐롤>에서는 테레즈가 캐롤이 매장에 두고 간 장갑을 보내주는 것으로 시작되지만, <소금의 값>에서는 선물 배송을 위해 주소를 알게 된 테레즈가 직접 캐롤에게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내면서 시작된다. 즉 여행을 가기 이전부터 테레즈는 이미 캐롤에게 강렬하게 매혹되어 있다. 캐롤에 대한 혼란스러운 감정이 무엇인지를 알아가는 <캐롤>의 테레즈와, 자신의 감정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시작하는 <소금의 값>의 테레즈는 이 부분에 있어 매우 다른 캐릭터이다.
이건 영화와 소설이 단순히 감정이 명확해지는 ‘시점’을 달리했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캐롤>에서 테레즈와 캐롤의 여행은 각자가 서로에게 가진 감정이 어떤 것인지를 확인해나가는 과정으로서의 면모가 보인다면, <소금의 값>에서 테레즈와 캐롤의 여행은 테레즈의 명확한 욕망이 어떻게 캐롤에게 가 닿는지가 더 두드러진다. 당연히 영화의 묘사법이 훨씬 정제되어 있고, 장면의 온도를 의도적으로 끌어올리는 시도를 자제하고 있다. ‘서사’의 폭발적인 진행을 보는 것이 핵심인 <소금의 값>과, ‘이미지’를 통해 감각에 접촉하는 것이 핵심인 <캐롤>의 매체적 차이를 토드 헤인즈와 필리스 나지는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동시에 이 전략은 영화와 소설에 서로 다른 결이 발생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 <소금의 값>의 테레즈는 적어도 본인의 감정적 측면에 있어서는 일정 부분 완성된 캐릭터이다. 이 캐릭터가 자신의 일상에 맥락 없이 끼어든 매혹적인 존재로 인해 열병을 앓고 이전까지의 삶을 뒤엎어버리는 캐릭터로 완성되었다면, <캐롤>의 테레즈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궁극적으로 인지해나가는, 성장 서사적인 캐릭터로 완성되었다. 이것은 단순히 ‘테레즈’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캐롤 역시 <소금의 값>에서는 어느 정도 완성된 인물로 등장한다. 반면 영화 속 캐롤은 테레즈와 마찬가지로 성장 서사적인 면모를 보인다. 단순히 테레즈에게 보내는 편지로 하지와의 이혼 조정 과정을 설명하는 <소금의 값>에 비해, <캐롤>은 캐롤이 하지와 직접 대면하는 장면을 담아낸다. 단호하고도 정중하게, 동시에 자신과 함께했던 사람에 대한 예의와 어쩌면 남아있을 일말의 감정을 담아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밝히는 캐롤을 만들어낸 영화는 소설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결을 획득해냈다.
The ‘price’ of salt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마태복음 5장 13절
소설 <소금의 값>의 제목에 대해 다른 해석이 하나 있다.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전기를 쓴 조안 쉥카의 관점이 그것인데, 하이스미스가 앙드레 지드의 <위폐범들>에 나온 구절을 원용해 성경을 인용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소금’은 삶 그 자체를 완성하기 위한 것이며, 동시에 그 ‘맛’을 잃지 않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가 존재한다. 그리고 캐롤과 테레즈는 기꺼이 자신이 감내해야 하는 대가들로 가득 찬 세계 안으로 뛰어들기로 한다. 필리스 나지와 토드 헤인즈의 <캐롤>은 영화만의 비전으로 재구성됐지만,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금의 값>과 동일한 태도로 이야기를 닫는다. 이 태도 속에 담긴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와 토드 헤인즈의 목소리가 무엇이었는지 온전하게 실감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자신들이 세상으로 밀어낸 캐릭터들을 힘껏 축복했다는 것만큼은 분명할 것이다.
※ 이 글은 2018년, 계간 영화잡지 <프리즘 오브> 를 위해 썼다. 출간된 원고와는 조금 차이가 있을 수 있는 데 지금의 판본이 글의 원래 형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