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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농부 세네월 Jan 13. 2022

청량산이 보이는 마을 길들

봉화 마을길 걷기,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길

(컬처라인 2021 I  vol.26  기고 글) 

지난번에는 발길로 이어지는 봉화 마을길을 걸어보았고, 이번에는 청량산이 보이는 눈(眼) 길로 이어지는 마을 길들을 걸어볼까 합니다. 청량산은 문수산과 함께 봉화를 대표하는 산이지만 청량산의 옛 명성은 자연경관의 빼어남과 더불어 주세붕의 <유청량산록(遊淸凉山錄)>에서 증폭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퇴계 은거 이후 52세 때인 1522년 주경유청량산록발(周景遊淸凉山錄跋)을 짓고 1523년부터 淸凉山人(청량산인)이라는 호를 사용했다고 했다고 합니다 <동국대 김동협 교수 논문>. 지리적으로 봉화의 명호면, 재산면 그리고 안동의 예안면과 도산면에 걸쳐 있지만 청량산은 퇴계가 주세붕의 유산기 발문에 오가산(吾家山)이란 표현을 쓸 만큼 친숙한 산이었습니다. 


∙ 고려말에 청량산은 퇴계 가문의 소유가 되었다. 퇴계의 5대 고조부 이자수(李子修)가 송안 군으로 책봉되면서 나라로부터 받은 봉산(封山)이다 : 
<퇴계평전 / 정순목 / 지식산업사>

위 구절은 유학자의 자연이해에 한 국면 주세붕의 유청량산록과 소위 이황의 청량산가에 대하여 <대동한문학 15호 김동협 대동한문학회>”논문에서 인용


퇴계 자신을 포함한 집안사람들이 청량산에 산재했던 절과 암자에서 (30여 곳이 있었다 함) 공부했던 곳이고, 그 자신 또한 즐겨 찾으며 애정을 갖고 있었던 곳으로 후에 대학자의 발자취를 따라 그를 존경하는 후학들이 방문해야 하는 성지가 되었던 곳입니다. 조선시대의 청량산 유람록이 50여 편에 달한다고 하니 그 인기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퇴계선생께서 좋아하시지 않을 수도 있겠으나 그 현상이 방탄소년단의 리더 RM이 다녀간 미술 전시회는 곧이어 많은 방문객들로 미어터지는 요즘의 세태와 다를 것 없다고 봅니다.
 

퇴계는 불교에 대해 “마음은 있으나 이치가 없다”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성리학자인 퇴계다운 언급입니다만 청량산에서 불교색을 유교 색으로 바꾸는 과정이 그 당시의 정치적 혹은 사회적인 상황에서 필요한 프로파간다[propaganda]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풍기군수였던 주세붕이 청량산에 와서 불교적인 봉우리 이름을 유교적인 이름으로 바꿀 수 있고, 유산록(遊山錄)을 쓰며 불교를 폄하하는 선비들의 가마를 메고 숙식을 제공하는 것이 승려들임을 생각하면 매우 불공정한 게임이었던 셈입니다. 그럼에도 선비들이 열심히 그 운동에 동참했던 것은 그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에서 다루기에 안전한 주제였기 때문일 것으로 짐작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15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청량산에서�불교색 빼고 유교색 입히기�의 열풍은 바람처럼 사라지고, 지금의 청량산은 단지 유명한 관광명소로서 남아 있습니다. 현재 청량산을 대표하는 청량사(淸凉寺)가 당시에는 탄압의 대상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세상일이 돌고 돈다는 것을 실감합니다음지가 양지되고 양지가 음지 되는 건 좋은데 정말 중요한 것은 저는 양지에만 있다 갔으면 하는 것이겠지요.     

청량산은 퇴계 이전 고려 31대 왕인 공민왕과도 인연이 깊은 산입니다. 청량사의 유리보전 현판은 공민왕의 친필로 알려져 있습니다. 현재도 남아 있는 남애길 들어서는 오마교, 재산면 넘어가는 길에 있는 오마도 터널의 오마(五馬)는 공민왕 시절 말 다섯이 다니는 도로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공민왕과 부인 노국공주는 2차 홍건적의 침입으로 청량산에 피신했다가 2개월 지난 1362년 2월 떠났다고 하는데, 그 흔적은 청량산 지역과 안동 가송리 일대에 부인당과 공민왕당으로 남아 있습니다. 제가 과문(寡聞)하여 공민왕이 그 옛날 개성에서 이곳까지 피난 왔었다는 것은 봉화에 내려와서야 알았습니다. 청량산 건너 축융봉에 있는 공민왕 산성은 피난 시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한 겨울 단지 2개월 피난지였음을 감안하면 그 설명에 수긍하기 어렵습니다.      


擧鞭先入畵圖中    내 먼저 고삐잡고 그림 속으로 들어가네.            

퇴계는 생애 6번 갔다. 그때마다 단출 한 산행이었다. 그런데 1564년은 달랐다. 16명을 초청했는데 13명이 참가했다. 혼자 사색하기를 좋아하며, 집단적 모임을 주도한 일이 거의 없는 퇴계에게 이 해 산행은 ‘퇴계식의 일상’으로 볼 때 매우 의례적이다. ‘유산遊山’의 의미를 알게 하고자 한 계획적인 산행으로, 퇴계 전 생애의 기념비적인 행사였다. 또한 마지막 청량산산행이기도 했다.

이날 천사에서 퇴계는 참석자 가운데 유일한 친구인 이문량에게 이런 시를 썼다.


烟巒簇簇水溶溶    산봉우리 봉긋봉긋, 물소리 졸졸,


曙色初分日欲紅    새벽여명 걷히고 해가 솟아오르네.


溪上待君君不至    강가에서 기다리나 임은 오지 않아,


擧鞭先入畵圖中    내 먼저 고삐잡고 그림 속으로 들어가네.


<농암종택 이성원님 글>



주로 혼자 사색을 하며 다니시던 분이 최연장자로 주선한 모임에 친구인 사람이 늦는데 화를 내기보다는 멋진 시 한 수를 남기는 퇴계의 여유와 아량이 범상치 않습니다. 우리는 “그림 같은 풍경” 이란 표현에는 익숙합니다. 그러나 “그림 속으로 들어가네.”라는 표현은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에 다다른 퇴계이기에 가능한 구절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림 같은 풍경”에는 화자와 화자가 보는 풍경이 분리되어 있지만 고삐 잡고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퇴계는 이미 한 폭의 동양화와 같이 그림의 일부입니다. 처음 이 시를 접했을 때 퇴계의 이런 표현이 멋지긴 한데 뭔가 생소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저 나름으로는 시인과 학자의 구분이 있었는데 그 경계가 모호해졌기 때문입니다.       

억지를 쓴다고 할지 모르나 저는 ‘청량산이 보이는 혹은 있는 풍경’을 퇴계식 ‘그림’으로 정의하고, ‘청량산이 있는 그림’으로 들어가는 마을길들이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보여주는 청량산 그림들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1. 35번 국도: (가송리에서 청량산 입구 구간)

35번 국도 중 안동 도산서원에서 봉화를 거쳐 태백까지 이어지는 구간은 여행안내로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쉐린 그린가이드 (※식당 별점으로 유명한 것은 미쉐린 레드가이드)�한국’ 편에서 도로로 유일하게 별점 하나를 받은 곳입니다.  레드 가이드와 마찬가지로 그린 가이드도 '꼭 가봐야 할 곳(★★★)', '추천하는 곳(★★)', '흥미로운 곳(★)' 등으로 구분하여 별점을 부여하는데, 우리나라의 여행지 중 '꼭 가봐야 할 곳' 23곳, '추천하는 곳' 32곳, '흥미로운 곳' 55곳 등 모두 110곳이 별점을 받았습니다. 그중에서 35번 국도는 도로로 유일하게 별점 하나, '흥미로운 곳(★)'을 받은 곳입니다. 우리나라에 경치 좋은 드라이브 코스가 매우 많지만 미쉐린의 입장에서 제일 좋아 보이는 곳이었던 모양입니다. 농암종택으로 들어가는 가송리 삼거리에서 청량산을 향하면 이내 봉화군으로 들어서게 되고 우측에 흐르는 낙동강과 멀리 보이는 그야말로 기암절벽의 청량산, 그리고 강 건너 펼쳐진 비교적 완만하게 보이는 농경지가 한데 어우러져 멋진 한 폭의 그림을 만듭니다. 어느 선비는 청량산유산기에서 이 광경을 “지상낙원”으로 표현할 만큼 마음을 여유롭게 만드는 풍경입니다. 만일 C형의 청량산 여행이 봉화를 거쳐 청량산에 접근하는 길이었다면, 청량산 입구를 지나 가송리 들어가는 다리까지 가기를 강력하게 권합니다. 만일 그곳까지 가셨다면 가송리 마을 들어가는 다리 중턱에 앉아 멀리 보이는 고산정(孤山亭)과 마치 산을 뚫고 흐르는 듯한 낙동강을 바라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낙동강은 봉화를 굽이굽이 돌아 나가기 전과 후에 산을 뚫고 혹은 뚫은 듯이 보이는 곳을 지나갑니다. 봉화에 들어오기 전 태백의 구문소에서 돌을 뚫고 나오는 도강 산맥(渡江山脈)-강물이 산을 넘는 광경을 연출하고, 일단 봉화에 진입하면 산태극 수태극으로 지형에 어우러지며 흐르고, 봉화를 지나 안동의 기점이 되는 고산정에서는 마치 산을 뚫고 흐르는 듯한 풍경을 연출합니다. 사실은 좌우측의 산자락이 각기 낙동강에 떨어지는데 서로 약간의 거리가 있지만 착시현상에 의해 양쪽의 산자락을 끊고 강이 흐르는 듯 보이는 것입니다. 이 구간이 도산에서 출발한 퇴계가 ‘그림으로 들어가는’ 구간이니 고금을 통해 높은 안목은 같은 결과를 도출하고 있습니다.

청량사 경내/ 예던길에서 본 청량산

2. “오렌지 꽃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펜션 – 전망대 
 청량산 건너 만리산(791.6m) 자락 남애길에 있는 “오렌지꽃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라는 카페의 전망대는 청량산과 낙동강이 어우러지는 아주 멋진 사진을 얻을 수 있는 사진 명소입니다. 그곳에 가려면 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그 다리가 오마교입니다. 오마교를 건너 얼마 가지 않아 길가에 서있는 소박한 ‘새마을비'를 만납니다. 다리와 농로를 만든 것은 44년 전이나 주민은 그 보다 100년 전부터 살고 있었으니 준공 이전 이들의 삶의 질곡(桎梏)이 어떠했을지 가히 짐작이 갑니다. “허리띠를 졸라매며 피땀 흘려 이룩한 증거”라는 비문이 농사를  짓는 저에게는 더욱 절절함으로 다가옵니다.         


 마을로 들어가는 길, 이곳에서 나고 자라 고향에 사과 수확을 도우러 왔다는 사람의 말에 의하면 선조 묘소가 5대조까지 있다고 하니 대략 한국전쟁 무렵 자리를 잡은 것으로 보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옆 골의 관창마을이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로 이전한 화전민이 시초였다고 하니, 이 만리산 자락의 마을들은 남북의 갈등으로 인해 생겼다는 공통점이 있게 됩니다.


전망대에 이르는 가파르고 좁은 산길 좌우로 사과 과수원이 있어서 가을철에는 그 길 또한 매우 아름답습니다만 길이 매우 좁아서 사과 수확 철에는 일하는 사람들의 차와 얽히면 그들을 매우 짜증 나게 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당장 제가 간 날에도 선두에 선 제 차를 포함해서 3대가 올라가는 도중에 갑자기 과수원에서 나온 2대의 차량에 야단까지 맞으며 길을 내주느라 고생했습니다. 

 전망대에서 보는 청량산은 ‘묏山이 바로 이런 것이다.'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풍경입니다. 전체적인 산의 모양과 그 주위를 돌아나가는 강과 주변 마을이 한눈에 드는데, 그 풍광이 아름다워 한참을 서있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마주 보이는 문명산과 그 산자락에 있는 청량산 하늘다리의 뒷면을 바라보는 윗두실 마을도 잘 보입니다.


3. 관청폭포 
 퇴계가 찾아 4수의 시를 남겨 유명해진 관청폭포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관청폭포는 “오렌지꽃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펜션 전망대에서 1km 거리의 산길을 내려오면 만날 수 있기도 합니다. 폭포 규모가 그리 크지 않으나 단정하고 소박한 모습입니다. 그 옛날 입소문을 듣고 나귀나 말을 타고 청량산 입구를 지나 일부러 폭포를 찾았을 퇴계를 생각하면 몇 분간의 추가적인 운전과 몇 백 미터의 걸음은 정말 별거 아닌 수고입니다.      

폭포도 폭포지만 기회가 닿으면 백 년 넘게 유지되고 있다는 관청폭포수계(修稧)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 일입니다. 1919년 퇴계의 유적 보존과 유덕 추모를 위한 관청 폭포 수계가 조직되었고, 이들과 봉화군의 지원으로 시비를 만들고 전망쉼터를 마련했다고 합니다. 정작 마을 이름은 “관창”인데 왜 폭포 이름은 “관청”인지, 관청폭포수계(修稧)의 修稧가 맞는 표기인지 궁금했었는데 하나는 풀렸습니다. 

https://cafe.daum.net/YEsarang/8iHg/1687?q=%E7%A8%A7

4. 북곡리 윗두실 마을

청량산을 마주 보는 문명산(876m) 자락의 윗두실마을에 가려면 약 250m의 높이를 시멘트로 포장된 외길을 올라가야 합니다. 다행히 지금은 일부 구간에서 확장공사를 하고 있지만 가는 도중 맞은편에서 차를 만나면 한쪽은 반드시 후진으로 길은 내줘야 합니다. 그런 꼬불꼬불한 길을 오르면 동구 밖 느티나무가 반기는 비교적 평지를 만나게 되는데 이곳이�윗두실�마을입니다. 주말에 애들이 온다고 배추를 다듬고 계신 칠순 중반의 할머니는 이곳이 고향이라고 합니다. “그 옛날 이 높은데서 생활하시기에 불편해서 힘드셨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전혀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아니요, 옛날에는 여기가 큰 마을이었고 우리 어머니 말씀이, 예전에는 대추 한 가마니로 쌀 세 가마니 하고도 남았다고 하셨는데 여기가 온통 대추밭 천지였거든. 이 마을에 술집이 두 군데나 있었어요.” 풍족하면 불편할 일이 없는 가 봅니다. 지금은 십여 호에 불과한, 한눈에 드는 마을이어서 상상이 안 가지만 우리는 불과 몇십 년 사이에 엄청난 변화를 만든 민족이고 또 엄청난 속도로 예전 기억을 잃기도 하지 않습니까? 
 

이 마을 끝 지점에는 전망대가 있어 청량산 하늘다리의 뒷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문명산과 청량산 사이의 계곡과 튀어나온 문명산의 낮은 봉우리가 어울려 범상치 않은 광경을 만듭니다. 저는 이곳에 왔을 때 미시령을 내려가며 처음 만난 울산암의 뒷모습에 감탄했던 생각이 났습니다. 울산암은 설악동 쪽에서는 안 보이고 산을 올라가야 보이는 풍경만 익숙했었지만 미시령 길이 생기고 처음 만난 울산암의 뒷모습은 절경인 데다 규모도 장대하여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규모는 그리 크지는 않으나 청량산 선학봉과 자란 봉, 그들을 이어주는 하늘다리가 있는 풍경이 저에게는 전혀 가늠할 수 없었던 그림입니다. 아마도 가파른 외길을 올라와 예기치 않았던 평지마을에서 만나는 풍경이어서 그런지 더욱 인상적이었습니다.  

    

청량산의 다양한 봉우리 모습과 적당한 규모가 각기 다른 지점에서 보아도 ‘청량산‘이라는 연속성을 유지하게 하는'떨어트려 놓고 보기’를 가능케 한다고 봅니다.  다른 지점에서 보면 '같은 대상의 다른 모습'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청량산의 그림은 제겐 특별히 더 역동적으로 느껴집니다. 퇴계의'그림 속으로 들어가기'를 주제로 시작한 얘기가 오히려'그림에서 나와서 보는'얘기가 되었습니다만 “들어가서도 보고 나와서도 볼 것, 그래야 잘 보인다"는 것, 언제나 맞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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