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재재소소

나에게도 선배가 필요해 2.

by 자발적 유휴인


마흔이 넘어 자발적 유휴인이 된 나는 작년 퇴사 후 제주에서 보낸 시간이 참 많았다.

제주에서 그간 여행의 목적으로 지나쳤던 장소나 공간들을 천천히 숨을 고르며 생각하는 시간을 주로 보냈는데, 터닝포인트의 시작은 제주 현대미술관의 <김보희 / The Days> 전시였다.


@usis_here_and_there




작가를 처음 안건 2000년대 초반, 내가 미술을 전공하던 대학생 때이다.

당시 그녀는 교수이자 21세기 잘 나가는 현대 작가 중 한 명으로, 학생이던 나에게 챙겨봐야 할 전시 목록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난 졸업 후 한동안 김보희 작가를 포함해 그 시절 작가들에 대한 관심이 딱히 없었다. 이유를 설명할 순 없지만 직장생활을 하면서 트렌디한 인물이나 사건, 아이템들을 살핌에도 시간이 모자라는데 굳이 시간을 뒤로 그 시절을 빛낸 (흘러간) 작가들을 곱씹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어리석게도 그땐 몰랐지.


@usis_here_and_there

그런데 작년 9월, 제주 현대미술관에서 마주한 김보희 전시는 나 자신에게 물음표와 느낌표를 동시에 가져다주었다. 전시장의 동선을 따라 그녀의 작품을 하나하나 볼 수록 오랜 시간 절정과 과도기 그 사이로 가득 찬 그녀의 고민과 성실함이 나를 압박하는 듯했다.


2000년대 초반에 내가 알던 그녀는 장지에 먹이나 채색화를 주로 하던 작업을 했지만 그녀가 제주도로 터전을 옮기며 환경이 바뀐 만큼 작업이 조금씩 바뀌었다. 나의 생각이지만 장지라는 재료의 특성상 습기가 많은 제주도에서 보관이 쉽지 않았을 것이라 재료를 하나하나씩 바꾸어 실험해보는가 하면, 주제 역시 자연이라는 큰 틀은 바뀌지 않았으나 제주의 자연을 담는 시선으로 조금씩 피사체가 바뀌었다.


@usis_here_and_t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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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건 오랜 시간 동안 그녀는 끊임없이 자신에게 집중하면서 지금까지도 방법을 찾아가며 빌드업하고 있다는 점이지 않을까.

분명 20여 년 전에도 이미 뛰어난 작가로 인정받았음에도 자기의 환경에서 고민하며 충실하게 성실한 작업을 계속했다는 것은 누구의 시선과 상관없이 오롯이 자신에게 집중했다는 것이겠지.





창작물은 받아들이는 개인에 따라 다른 인상과 감동을 준다. 그러나 그러한 창작물이 개인을 넘어 대중에게 찬사를 받을 땐, 그 창작물을 그대로 해야 할지 혹은 변화를 준다면 어떻게 하는 게 하면 좋을지를 고민하며 계속된 '찬사'를 목적으로 한다. 물론 김보희 작가도 이러한 목적일 수도 있고 혹은 먹고살기 편해서 본인 작업에만 열중한 마나님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어떠한 상황과 목적이라 해도 실험적인 노력과 꾸준한 성실함은 무엇을 대변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내가 주워진 환경 안에서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나를 위해 꾸준한 무언가를 한다는 건 시간이 지날수록 나이만 먹는 게 아니라 시간만큼 단단하게 성장하고 있다는 것이니까.




@usis_here_and_t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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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삼청동 국제갤러리에 이기봉 작가 전시를 봤다. 솔직히 말하면 그 후로 두 번 더 다녀왔다.

이기봉 작가는 10년이 넘는 전시 소식의 공백을 무색하게 빈틈없는 그의 철학이 깃든 작업으로 가득 채웠다.


Where you stand


워낙 큰 사이즈의 작업들이 많다 보니 크기의 중압감이 처음 느껴지고, 실루엣을 보여주는 뒷단의 세밀함과 치밀함에 감동을 넘어 존경심이 느껴진다. 10여 년 전보다 작가는 더 단단하게 견고한 밀도감이 느껴졌다.

오랜 시간 동안 내 귀에 소식만 들리지 않았을 뿐 묵묵히 자신의 작업을 빌드업하며 쌓고 있었던 점이 리스펙이다. 마치 카타르월드컵에서 벤투 감독의 4년이 넘는 시간동안 묵묵히 쌓은 빌드업 전술처럼 말이다.





김보희 작가는 1952년, 이기봉 작가는 1957년생이다. 아직까지도 세대를 불문하고 전 세계 갤러리에서 인기 있는 데이비드 호크니는 1939년생이며 알렉스가츠는 1927년생이다. 올해 2023년 루이비통과의 컬래버레이션의 주인공은 1929년생 아요이쿠사마다.


@hypebe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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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들처럼 유명인이 되고 싶다는 꿈은 없다. 솔직히 말하면 누군가들의 많은 찬사와 인정을 받는 무엇이 되면 당연히 마다하지않게 감사하지만, 나도 안다. 현실적으로 많이 불가능하다, 알고 있다.

단지 내가 이들에게 자극을 받는 건 지금의 내 나이를 거쳐(버텨) 현재까지도 지속 성장하는 모습이다. 나 또한 지금의 이들처럼 꾸준히 노력하고 무언가를 성실히 해나가는 유쾌한 할머니로 나이가 들었으면 좋겠다.


누가 알고 말고 따위 뭐가 중요해.
내가 알면 됐지, 내가 알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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