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대 없는 엄마의 공간, 베란다 한평

옛 아픔은 가고 새로운 행복이 들어올 때다

by 엄지언

우리 집엔 화장대가 없다. 매트리스 큰 걸 두 개 붙이고 아이들에게 방을 내주며 내가 자진해서 퇴출시켜 버렸다. 앉아서 화장할 시간 없는 나라 오히려 후련했었다. 그런데 요즘, 엄마를 상징하는 공간이 우리 집에 너무 없는 거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의 화장대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신비로움 어른스러움 동경 같은 봉글봉글한 추억. 그런 게 우리 딸에겐 없다니.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끝까지 지킨 나만의 공간이 있다. 그곳은 우리 집 조그만 베란다. 깔끔 완벽한 남편에게 이 곳은 내 공간이니 절대로 청소하지 말라며 엄포를 놓은 장소다. 답답할 때 문을 열어 바라보고 숨만 쉬어도 마음이 탁 트이는 나만의 휴식공간이다. 옛날 습관성 유산으로 고생할 때 내가 미치지 않도록 지켜준 고마운 곳이기도 하다. 화장대 같은 신비로움은 없지만, 나를 닮은 따뜻하고 진솔한 생명력 넘치는 공간이다.


이 공간을 올해부터 다시 살려볼까 한다. 난 식물과 대화(?)가 가능한 극세사 자연녀다. 예전 베란다 텃밭을 거창하게 운영했는데 기록이 많이 없다. 다시 시작할 생각만으로 마구 설렌다. 이런 마음으로 오늘은 화분 하나를 정리했다. 다 죽은 제라늄을 뽑아내고 흙을 뒤엎었다. 씨앗을 사 와서 이것저것 심어야겠다는 생각. 흙을 뒤엎는데 발견한 반가운 애벌레 한 마리. 왠지 느낌이 좋다. 요즘 과거 이야기를 쓰는데 심리적 치유가 상당하다. 송구영신, 옛 아픔은 가고 새로운 행복이 들어올 때다. 이렇게 <베란다 한평 자연놀이> 이야기 시작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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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제라늄을 정리하며 마음을 새로이 하다


다 죽은 제라늄 세 그루를 뽑아냈다. 2015년부터 함께해서 5년을 버텨주었던 고마운. 육아하느라 힘들어 식물들에게 등한시했었다. 말라죽고 추워 죽고 더워 죽고 너무 미안하면서도 손쓰지 못했다. 더 이상 식물을 들이지 않고 있는 몇 가지로 버텼더랬다. 용케 매년 꽃을 피워대던 제라늄. 그런데 이번 겨울 추워도 깜박하고 실내로 들이지 않았다. 잎이 다시 나지 않길래 흙을 파보니 뿌리가 썩어있다. 추운데 비가 오고 얼고 녹고 하며 그렇게 된 듯하다. 사실 제라늄만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 집 버티던 몇 안되던 식물들이 작년을 고비로 유명을 달리했다. 핵폭탄급 고통을 겪고 진짜 바닥을 쳤던 우리 가정을 보는 것 같다. 우리 대신 이리된 것 같다는 생각까지. 제라늄의 고결한 희생에 힘입어 이제는 일어나야겠다. 새로운 것을 희망과 함께 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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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분 정리의 명상 효과


흙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좋은 효과가 있다. 흙냄새는 뇌가 행복감을 느끼게 해 준다. 세로토닌이 증가한다는 연구 결과다. 삶의 질이 높아지고 면역력이 향상된다. 스트레스를 떨어뜨리고 불안을 낮춘다. 아이가 마음껏 흙을 파고 담게 해주자. 햇빛이 잘 드는 베란다라면 더더더욱 좋다. 나의 경우는 오후 5시까지만 아이가 베란다에서 맘껏 흙놀이를 할 수 있게 해 준다. 베란다를 매번 청소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베란다 바깥에 흙을 가지고 나오지 못하도록 한계를 정했다. 아이가 발을 털다 떨어진 베란다 입구의 흙은 하루 한번 오후 5시에 싹 닦는다. 나는 이렇게 하지만 각자에게 맞는 최적의 방법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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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벌레 집 만들어주기


흙을 뒤엎는데, 앗! 반가운 애벌레 한 마리를 발견했다. 너는 어떤 곤충의 애벌레니? 사진을 찍어 호들갑을 떨며 남편에게 보여줬다. 남편이 풍뎅이류일듯하다 한다. 아이들에게 보여주니 꺅꺅 소리를 내며 신나 한다. 아이 둘이 한참 들여다보다가 첫째 헬렌이 집을 만들어주고 싶다고 한다. 애벌레를 빈 통에 담더니 흙을 담았다. 바닥에 있는 애벌레가 꼬물꼬물 안으로 파고 들어가는 모습이 투명한 통 바깥으로 보인다. 흙 위에 이끼로 장식을 해주었다.






유달리 추워 느끼지 못했는데 봄은 어느새 성큼 문 앞에 와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