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변호사가 생각하는 "좋은 판사"

당사자를 설득할 수 있는 판결

by 엄건용 변호사


어떤 판사가 좋은 판사일까에 관한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



사법부의 역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판결문"을 만드는 것이다. 판결문은 민사 사건에서는 강제집행의 출발점이 되고, 형사재판에서는 국민의 자유를 구속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판결문은 국민의 재산과 자유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권력 행사를 '당하는' 국민을 납득시킬 수 있어야 한다.


변호사는 판결문의 재료가 되는 "주장"과 "증거"를 정리해서 제출하고, 판사는 이를 엮어서 판결문을 만들어낸다. 변호사는 판결문이 작성되는 원리를 알고 있어야만 소송에서 의미있는 서면을 써 낼 수 있다. 그래서 좋은 서면은 판결문에 이른바 "복사/붙여넣기"가 되고는 한다. 좋은 판결문이 나오려면 변호사의 역할도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판결문에 활자를 집어 넣어 하나의 문서를 완성시키는 것은 결국 판사의 역할이다. 마치 역사가들이 역사에 기록될 사건을 취사 선택하여야만 그 사건이 역사가 되듯이, 어떤 사건의 사실관계는 판사가 판결문에 적기로 인정해야만 법률적으로 의미있는 '사실'로 인정된다.


좋은 판사는 어떤 판사인가에 대하여는 철학적인 논의가 많이 있고, 변호사들마다 생각도 다르다. 필자는 당사자들의 주장을 빠짐없이 판단해주는 판사가 좋은 판사라고 생각한다. 국민들은 자신의 사건에 대해 각자마다 생각이 있다. 판사가 당사자의 생각을 배척하고 다른 판단을 하려면, 그 사람의 생각은 어느 부분에서 근거가 부족한 것인지 명확히 밝혀줘야 한다. 그래야만 당사자도 판사가 자신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주었다고 느끼면서 판결에 승복할 수 있다.




변호사는
펼칠 수 있는 모든 주장을
빠짐 없이 개진할 수 있어야

당사자가 승복할 수 있는 판결문은, 쟁점이 정확히 정리되고 주요 주장에 빠짐없이 답하는 구조에서 나온다. 그래서 유능한 변호사는 소송을 수행하면서 ‘쟁점-사실-증거-법리’의 순서로 서면을 설계하고, 재판부가 모든 주장을 빠짐 없이 판단해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당사자들이 판사에게 실망한 순간들

어느 법원의 민사 단독 사건(재판부가 판사 1명으로 구성된 사건)에서 있었던 일이다. 필자와 상대방의 주장이 총 10개라면, 판사는 그 중 2개에 대하여만 판단을 하고, 나머지 8개에 대하여 판단을 하지 않았다. 물론 일부만 판단하면 나머지에 관하여는 굳이 나아가 판단하지 않아도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의 법리는 그와 관련된 것이 아니었다. 원고와 피고가 수십장의 준비서면을 거의 10회 가까이 제출했는데 판결문은 고작 3쪽이다. 패소한 당사자는 이런 판결문을 받아보면 '판사가 우리 사건을 제대로 들여본게 맞느냐'고 의심하게 된다.


또 다른 법원의 민사 단독 사건이다. 소가가 2000만원 수준 밖에 안 되는 작은 사건이기는 하나, 계약 해제에 관한 법리가 꽤나 첨예하게 다투어졌고, 당사자들이 소송에 굉장히 적극적으로 임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의 판사는 변론을 진행하는 도중에도 계속하여 조정을 권하였지만 당사자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판사는 재차 화해권고결정을 했고, 당연하게도 쌍방이 받아들일 수 없다고 이의했다. 그러자 이 판사는 변론기일을 열어 당사자들을 불러모으더니, 다시금 조정을 강요하면서, '화해권고결정을 하면 승복하는게 좋을 것이다'라는 취지로 말하면서 두 번째 화해권고결정을 내렸다.


화해권고결정을 해서 당사자들이 이의를 하지 않으면 그대로 판결이 확정되므로, 판사는 복잡한 판결문을 작성할 필요가 없어질 것이다. 당사자들은 "조정할 의사가 없다고 여러번 밝혔는데도 왜 계속 화해권고를 내리는 것이냐"고 물어오면서, 혹시 판사님이 판결문을 쓰기 싫어하냐고 의심한다.




법원에 대한 신뢰를 더 키우려면

국민들은 법원을 존중(respect)한다. 법원을 생각하면 괜히 엄숙해지고, 법복을 입은 판사 앞에서는 왠지 예의 바르게 행동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이것이 모두 국가의 자산이다. 사법질서를 존중하는 국민이 있기 때문에 국가가 돌아가는 것이다(법원의 판결을 무시하는 국가들이 실제로 존재한다. 당연하게도 그러한 국가는 치안이 불량하다).


한정된 자원과 인력으로 좋은 판결을 내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국민들은 판사가 가능한 최선을 다하여 사건에 임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를 느끼고 있다. 국민들이 사법부에 보내는 무언의 존경에 화답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좋은 판결"을 내는 "좋은 판사"가 많아지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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