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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풍 Jan 27. 2022

프리랜서는 더 잘 먹어야 한다

귀찮은 아침엔 마주스 한잔

이제 막 서른이 됐을 때.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병이 나에게 찾아왔다. 이름하야 메니에르 병.


서 있지도 못할 만큼의 미칠 듯한 어지러움에 반강제 와식 생활을 했다.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야 좋아진다는 말에 세상과 단절한 채 한 달을 보냈다. 마치 세상에 갓 태어난 신생아처럼, 난 아무것도 모르오, 아무것도 할 수 없소- 하면서 말이다.


들어오는 일도 받지 않았고, 지인들과의 연락도 내게 조금이라도 자극을 준다 치면 얄짧없이 끊었다. 식단도 신경 써서 관리했다. 빨간 국물과 짠 음식은 멀리 했고, 물도 하루에 1L씩 마셨다.


심지어 드라마나 영화 심한 갈등이 있는 건 안 봤다. 어린이 만화나 풍경 영상을 주로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두 달 정도 호르몬 약을 먹으며 건강 관리를 나름 열심히 한 결과 청력이 정상 수치로 돌아오면서 메니에르 병이 나았다. 기뻐하는 나와 달리 의사 선생님은 심각한 얼굴로 경고했다. 증상이 또 올 수 있으니 방심하지 말고, 스트레스 받지 말고 건강 관리 잘하라고 말이다.


하지만 인간이 어떻게 스트레스를 안 받고 살 수 있을까. 얼마전 나는 그때와 비슷한 익숙한 어지럼증을 느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생리까지 터졌다. 머리가 땅 속으로 가라앉는 듯한 두통과 어지러움이 나를 감쌌다. 하얗게 질린 내 얼굴을 본 남편은 깜짝 놀랐다. 그렇게 또다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5일을 누워있었다. 그때서야 아차 싶었다. '맞다, 나 요즘 개판으로 살았지'




작년 11월, 프로그램 2개를 연달아 끝내고 자유로운 집순이로 컴백한 나는 그동안 소원했던 지인들과 만나며 연말연초를 보냈다. 또 밀린 영화와 드라마, 웹툰을 정주행 하며 밤낮이 바뀐 생활을 했다.


새벽 3-4시쯤 자고, 11시에 슬그머니 눈을 떴다. 운동도 안 하고, 하루에 해를 보는 시간이라곤 베란다에서 10분 동안 서 있는 게 전부였다. 식단은 말해 뭐하는 가. 하루에 한 끼만 챙겨 먹고, 야채는 안 먹은 지 이미 오래됐다.


그런데 좀 서글픈 게. 이런 생활 루틴이 20대 때는 썩 괜찮았다는 거다. 그땐 오히려 몸과 마음이 충전됐다. 맘껏 놀고 푹 쉬고, 게으름 피우면서 에너지를 쌓았다.


하지만 30대가 되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으른 생활 만으론 충전이 되지 않는다. 이젠 건강한 휴식과 보살핌이 필요하다. 아 젊음이여...


사무실에 출근이라도 하면 억지로라도 규칙적인 기상과 식사를 할텐데,100% 재택을 하는 프리랜서로 지내는 요즘 같은 시기엔 자칫 잘못하다 골로 가겠다 싶어 스스로 다짐을 했다. 나를 더 돌봐주자고. 나는 내가 챙겨야 한다고.


뭐부터 할까 하다가 '잘 챙겨 먹기'부터 실천해보기로 했다. 사실 수면 습관은 당장 개선되기 힘들고, 운동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아직 정신을 못 차렸다.) 

하지만 잘 먹는 건, 조금 자신이 있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2주 전쯤 엄마가 챙겨준 마가 눈에 들어왔다. 신문지에 돌돌 쌓여 있는 흙이 잔뜩 묻은 마였다. 손질하기 귀찮아 냉장고 제일 아래칸에 처박아 두고. '저걸 언제 먹지...' 하면서도, 끝내 모른 척하던 재료였다.


혹시 썩진 않았을까 마음  쫄리며 신문지를 살짝 들보니 다행히 상태가 좋았다. 왼손으로 마를 잡고, 오른손으로 껍질을 벗겼다. 껍질을 벗길수록 미끄덩한 진액이 나와서 떨어트리지 않게 잘 잡고 있어야 한다. 고백하자면 나는 싱크대 위로 몇 번 놓쳤다.


껍질을 다 벗긴 마를 조각내 반은 믹서기에 넣고, 반은 반찬통에 넣어 냉동실에 얼렸다. 마가 들어 있는 믹서기에 추가로 우유와 밤꿀. 그리고 사양 벌꿀도 조금 넣었다. 밤꿀은 몸에 좋으라고 넣은 거고, 사양벌꿀은 단맛을 내기 위해 넣었다. 밤꿀이 그렇게 막 달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물도 조금 넣었다.


우유만 넣고 갈아도 되는데, 그럼 내 입맛엔 너무 무겁고 끈적거려 끝까지 맛있게 마시기 어렵다. 물을 살짝 넣으면 끈적함도 줄고 좀 더 깔끔하다. 여름엔 얼음 가득 넣어 슬러시처럼 갈아먹는 것도 좋아한다. 껍질을 벗기고 믹서기를 씻는 수고를 들여 완성한 마 주스. 마주스 한잔으로 오늘치 건강을 챙겼다. 이 한 잔에 오늘 하루를 잘 살아낸 거 같은 뿌듯함이 밀려왔다.




냉동실에 얼려 놓은 남은 마는, 아침을 먹어야 하는데 차리기는 귀찮고. 그렇다고 시리얼로 대충 때우기는 싫은 날 꺼내서 먹으려 한다. 그게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미래의 나여, 부디 귀차니즘을 이겨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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