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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풍 Feb 07. 2022

프리랜서 공백기를 이겨내는 목욕법

나는 방송작가이다. 방송작가는 레귤러 프로그램에 들어가 몇 년씩 길게 일할 때도 있고, 파일럿이나 특집 프로의 경우 짧게는 한 달. 길게는 6개월 정도 일하고 다시 백수로 돌아갈 때도 있다.


2020년 가을. 2년간 일했던 레귤러 프로그램을 그만뒀다. 애정 했던 프로그램이었지만 새로운 도전을 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렇게 2020년 겨울부터 지금까지 길게는 다섯 달, 짧게는 2주 정도 일하며 총 다섯 개의 콘텐츠를 마무리했다.


**콘텐츠 업무 기간**

A 콘텐츠 = 3개월

B 콘텐츠 = 4개월

C 콘텐츠 = 6개월

D 콘텐츠 = 2주

E 콘텐츠 = 3개월


짧게 여러 프로그램을 하면 다양한 경험과 인맥을 쌓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또 팀을 옮길 때마다 생기는 공백기엔 다음 콘텐츠를 위한 충분한 인풋을 할 수 있어 즐겁다. 하지만 점점 줄어드는 통장잔고와 동료 작가들의 프로그램을 보면 마음이 초조해진다. '그다음 일은 언제 할 수 있을까.' '이번 분기에 괜찮은 자리가 없으면 어쩌나' '이대로 쭉 쉬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한 마음이 멘털을 흔든다. 그런 마음이 들 때마다 내가 하는 게 있다. 바로 내 몸을 아주 정성스레 '때 빼고 광내는' 일이다.




일을 하다 보면, 의외로(?) 대충 씻고 잘 때가 많다. 퇴근하고 집에 오면 너무 지쳐 세수와 양치만 하고 잘 때도 있고, 샤워를 한다고 해도 비누거품으로 밖에서 묻혀온 먼지만 겨우 털어낸다. 로션을 바르는 것도 사치다. 물기만 겨우 닦고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기 바쁘다.


그렇게 몇 개월을 걸쳐 프로그램을 끝내고 나면, 훈장처럼 퍼석퍼석한 피부가 남는다. 평소에 관리하면 참 좋겠지만 소위 '빡센' 프로그램에서 일하면 그게 정말 쉽지 않다. 연차가 어리면 어릴수록 더더욱. 그래서 나는 공백기가 오면 제일 먼저 '나 자신을 돌보는 목욕'을 한다. 일하면서 바쁘다는 핑계로 돌보지 못한 내 몸을 깨끗하게 리프레쉬시키는 거다.


**목욕 준비물**

입욕제

비누

바디로션

좋아하는 만화

커피우유


먼저 욕조에 따뜻한 물을 가득 받는다. 평소엔 가스비가 많이 나올 까 봐 수전을 왼쪽으로 다 돌리지 못했는데 이날만큼은 온수를 팍팍 튼다. 그리고 고이 모셔놓은 러쉬 입욕제를 욕조에 퐁당 던진다. 색색깔로 반짝이며 일렁이는 목욕물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기분이 좋아진다.


입욕제의 달큼한 향이 욕실에 가득 찰 때쯤. 욕조 밖에서 간단히 물 샤워를 하고 욕조로 들어간다. 평소 수족냉증이 있어서 보일러를 틀어도 발끝이 찬 편인데, 뜨끈한 욕조 물에 발이 닿자마자 찌릿찌릿하며 피가 돌더니 이내 온몸에 포근한 느낌이 감돌았다. 그렇게 상반신을 물에 푹 담그고 있으면 금세 노곤해진다.


이때 나는 좋아하는 만화를 틀어놓는데, 이번 공백기에 내가 꽂힌 만화는 바로 '짱구'이다. 어렸을 때는 투니버스에서 할 때마다 봤는데 성인이 되고 난 후엔 한 번도 보지 않았다. 그러다 얼마 전 친구의 추천으로 보게 됐는데, 세상 이런 힐링이 없다.


끊임없이 떠들고 말썽 피우는 짱구 덕에 만화를 보고 있는 동안엔 잡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 떡잎마을 친구들의 순수한 행동을 보고 있노라면 사회생활로 검게 찌든 마음이 정화된다. 그렇게 짱구를 보며 현실을 잠시 잊다 보면, 어느새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한다.



더 누워있으면 잠들 거 같은 느낌이 들 때쯤! 재빨리 때수건 혹은 바디 스크럽을 꺼낸다. 체력을 좋은 날은 때수건으로 때를 밀고, 노곤한 기운에 힘이 빠져 때를 못 밀 거 같은 날엔 바디 스크럽을 사용한다. 오래간만에 각질을 제거하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다.


각질을 제거하고 있노라면 다리와 팔에 삐져나온 털이 보인다. 그럼 피부가 까지거나 다치지 않도록 정성스럽게 제모를 한다. 그리고 선물 받은 고오급 천연비누를 꺼내 거품을 만들어 온몸에 바른 후 깨끗한 물로 헹궈 마무리한다. 고오급 비누답게 피부가 반질반질해진다.


이쯤 오면, 평범한 사회인 기준으로 체력 소모가 상당하다. 다음 단계는 건너뛰고. 지금이라도 당장 수건으로 대충 물기를 닦고 침대에 눕고 싶지만, 참아야 한다. 보습을 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졸음을 참으며 바디로션을 온몸에 마사지하며 바르면서 피부에 흡수시킨다. 건조함으로 가렵던 피부는 이제 안녕이다. 그렇게 뜨끈한 김을 내뿜으며 욕실에서 나와 냉장고에 미리 넣어놨던 커피우유를 원샷한다. 에너지가 완충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어렸을 때는 프로그램이 끝나고 오는 공백기가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그동안 못 놀았던 거 다 놀아야지'  하면서 즐겁게만 보냈는데, 점점 연차가 쌓이고 나이가 드니 초조해진다. '또 백수가 됐구나' '다음엔 또 어디서 일하지' 걱정부터 앞서고 조급해진다. 그래서 어쩔 땐 빨리 일하는 데에만 급급해서 잘못된 선택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몇 번의 후회와 실패를 겪고 나서 깨달았다. 이럴 때일수록 스스로를 돌보고 가꾸면서 마인트 컨트롤하는 게 중요하다고. 그리고 이 모든 걸 해내는 데엔 '목욕'만 한 게 없는 거 같다. 오늘도 내 몸을 정성스레 닦으며 '그동안 수고 많았다'고 스스로를 다독인 후, 한결 개운해진 정신으로 다짐한다.


"공백기는 내가 더 발전할 수 있는 기회이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말자!"

"지금은 백수로 마냥 쉬고 있는 게 아니다. 나 자신의 상품성을 높이기 위해 발전하는 기간이다. 내일 하루도 충실히 보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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