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늘은 푸르렀고 지구는 언제나 둥글다.
4월 스페인 봄 세비야
마드리드에서 기차를 타고 세비야에 도착했다. 기차 타고 오는 내내 평원에 가득한 올리브나무와 해바라기가 '얘, 너 지금 스페인이야'하고 말해준다. 학생 비자를 받기 위해 이 도시에서 1년 동안 머물러야 하는 계획으로 왔지만 운 좋게도(?) 비자가 1년 꽉 채워 나왔고 계획을 전면 수정할 수 있었다. 기존 등록한 어학원 비용을 주거비로 돌렸고 덕분에 계절이 바뀔 때마다 스페인 이 도시 저 도시에 머무를 수 있었다.
즉 학비로 주거비를 돌려 막은 나는 공부는 덜하고 경험은 더한 셈이다. 언제나 계획은 계획처럼 되지 않는 걸까. 어쩌면 어학연수는 내 계획이 아니었던걸까. 그냥 모든 것을 경험해보고 싶었고 이 낯선 땅에서 살아보고 싶었다. 그때 착실하게 세비야에서 1년 공부했다면 사회적으로 말하는 더 훌륭한 모습으로 현재를 살고 있을 수도 있겠지만 한 도시, 한 공간에서 머물려 공부하기에 스페인은 너무 따뜻했다.
아직도 선명하다. 나보다 더 큰 배낭을 메고 32인치 캐리어를 끌고 가는 어린 동양 여자애. (당시 세비야에 동양인이 많지 않았다. 여자는 더욱, 나이 어린 여자는 더더욱.) 역에 도착하자마자 예상치 못한 비에 조금 당황했다. 택시를 타자니 의사소통이 안될까 봐, 바가지 씌울까 봐 겁이나 그 짐을 끌고 그대로 시내버스를 탔다. 종이지도를 쥔 손엔 땀이 났다. 버스는 10분 정도 달려 세비야 중심지에 나를 데려다주었다. 그래 봐야 10년 전이지만 당시엔 스마트폰이 보편화되기 전이었고, 누구에게 길을 물어봐야 하나 두리번거리다 어느 노부부와 눈이 마주쳤다.
"¡Qué niña! ¿Cómo estás? ¿De dónde vienes?" ( niña: 어린 소녀)
"에구 아가, 너 괜찮니? 어디서 왔니?"
내 볼을 살짝 꼬집으며 말을 건네는 노부부 모습에 한국에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 생각은 물론 순간 모든 긴장이 풀렸다. 세비야의 첫인상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세비야에서 삶은 따뜻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차저차 더듬더듬 설명하던 나는 노부부에게 주소를 보여주었고 웬걸, 이 사랑스러운 커플은 나를 주소지까지 데려다주었다. 돌바닥에 점점 선명해지는 캐리어 바퀴 소리, 부슬부슬 내리는 비 냄새, 세 사람의 찬찬한 걸음. 그때 할머니 손에 든 갈색 지팡이, 할아버지가 쓰고 있던 베레모, 노신사의 따뜻한 눈빛. 지금도 생생하다.
2020년 3월 서울 봄
Covid-19가 전 세계 기승을 부리면서 이제 유럽 대륙을 휩쓸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스페인 일간신문을 열심히 보고 있는 요즘이다. 처음엔 '신종'바이러스인 만큼 박쥐, 인수공통 감염, 바이러스 숙주 등 새로운 단어 공부할 참에 들여다보다 이제는 걱정으로 읽는다. 현 시간 스페인 사망자가 700명을 넘어섰다. 의료시설과 물품이 부족해지면서 신종 바이러스의 최대 피해자 혹 희생자는 '신'종이 아닌 이 땅에서 착실히 묵묵히 살아가던 '노'인이 됐다. 비극적인 기사가 이어진다. 마드리드 한 거주시설에서 노인 51명이 하늘로 떠났다. 그 누구도 명확하게 말하고 있지 않지만 모든 것이 부족한 현상황을 감당하지 못해, 병원에선 감염된 노인 치료에 손을 못쓰고 있는 듯하다. 이탈리아처럼 (슬프게도) 나이와 건강상태로 환자를 선별 치료한다는 인터뷰도 있다. 보호물품이 모자란 요양사는 집에서 쓰는 장갑을 가져왔고 의료진 봉사자 모두 최전선에서 싸우고 있다. 한 치료센터에서는 노인의 자식을 호출해 아버지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하도록 허락해주었다. 노인은 바이러스 검사 조차 받기 전에 숨을 거두었고 사인은 폐렴으로 분류되었다.
아직도 잔상이 진하다. 나는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에서 (혹 인간극장) 노부부가 보여주는 백년해로 정석의 아름다운 모습보다 할아버지가 벽에 거울을 걸다 힘에 부쳐 마음대로 되지 않자 스스로 화를 내는 장면이 기억이 남는다. 벽에 못을 뚫고 거울 하나 거는 일은 20년 전 청년에겐 식은 죽 먹기였을 것이다.
어느 날 1호선을 타고 집에 가던 중 맞은편에 청년과 할아버지가 나란히 서있는 뒷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꼿꼿하고 건장한 청년과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의 등. 자글자글한 주름과 검버섯의 손 그리고 팽팽하고 다부진 청년의 손. 단순히 늙음 젊음의 차이가 아닌 흐르는 세월이 보여주는 먹먹함이자 인생의 순간이었다.
10년이 지났으니 세비야에서 나의 첫 햇살이 되어준 노부부는 이제 여든 혹은 아흔을 훌쩍 넘었을 거다. 그들의 따뜻한 눈빛이 떠올라 하루 종일 힘이 빠진다. 부디 잘 이겨내셔서 스페인의 따뜻한 햇살 아래 오래 머물다 따뜻하게 가셨으면 좋겠다. 오늘 하늘은 푸르렀고 지구는 언제나 둥글다.